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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그날 죽다 살아나 ‘민주화와 통일’ 소명 깨달았죠”

등록 2016-04-18 19:01수정 2016-04-19 10:08

 왼쪽이 이해학 원로목사.
왼쪽이 이해학 원로목사.
[짬] ‘4.19혁명 부상자’ 인정받은 이해학 원로목사
“미완의 4·19 혁명을 완성하는 일은 통일입니다.” 한평생을 반독재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일선에서 앞장서온 이해학(71) 성남 주민교회 원로목사가 56년 만에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4·19 혁명 부상자’로 인정을 받았다.

이 목사는 그동안 4·19 부상자 동지회에 가입하지도, 부상자 신청도 하지 않았다. “4·19 혁명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터지니까 4·19 부상자 동지회에서 지지 데모를 했어요. 그때 언론에도 실렸는데 저는 ‘이건 아니다. 4·19 정신이 결코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일부 타락한 사람들도 있었고….” 민주화운동으로 4번의 옥고를 치른 그는 누적된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져 지난해 9월부터 지리산 기슭에서 백수의 어머니(한맹순)를 모시고 요양 중이다.

신문배달하며 고학하던 고교 2년생
4.19때 거리에서 총 개머리판에 맞아
기적처럼 깨어나니 ‘빨갱이’ 취조

“부상자동지회 5.16 지지에 다른 길”
70년대 개척교회 열며 반독재 투신
4차례 옥살이 후유증으로 요양중

이 목사는 18일 “나는 4·19 때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4·19 때 18살로, 광주공고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치러진 60년 3월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17살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전국적으로 이 대통령 하야 요구가 거세졌다. “고학하며 학교를 다니던 저는 그때 <경향신문>을 배달했어요. 신문은 검열 때문에 늘 공백이 많은 채 나왔고 그런 것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세상에 눈이 뜨이고 민주의식이 자랐던 것 같아요.”

김 열사의 주검이 떠오른 며칠 뒤 4월19일, 그는 동기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선생님들이 교문을 걸고 제자들을 막았지만, 광주여고 앞 네거리에서 조선대생들과 함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청으로, 경찰서로 나아갔다. 그 와중에 그는 공포탄을 쏘며 진압에 나선 경찰의 총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서 눈을 뜨니까 형사가 대뜸 ‘대학생 누구하고 주도했냐’, ‘너 빨갱이와 연결됐지’라며 취조를 하는데 ‘아 빨갱이와 연결하려는구나’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형사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병원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이 목사와 고교 동창인 이용중씨는 “그날 해학이가 깨진 이마에 붕대를 감고 학교에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계란을 함몰된 이마에 올려놓고 ‘코페르니쿠스’라 놀려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불의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 몸을 던진 친구였다”고 전했다.

130명이 숨지고 1천명 이상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국민 저항 끝에 4월21일 이승만은 하야했지만, 이 목사의 이마에는 지금껏 함몰 흔적이 남아 있다. 그때 코뼈도 부러지면서 평생 비염도 달고 산다. 하지만 군사 쿠데타를 지지할 수 없었던 그는 부상자 보상을 신청하는 대신 반독재 민주 투쟁의 길로 나섰다. “그때 머리가 깨지고도 몇시간 만에 깨어난 것은 기적이었어요. 남은 생애는 하늘이 덤으로 주는 것이니 이 나라의 민주와 통일을 위해서 살아라,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살려고 애썼습니다.”

한신대를 졸업하고 73년 성남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를 개척한 이 목사는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온몸을 던져 싸웠다. 74년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독재 초기에 김진홍·인명진 목사 등과 함께 유신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해제,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가 1년 남짓 복역하다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긴조 1호 위반’ 최초의 구속자였다. 또 76년에는 문익환 목사와 이우정 교수 등의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돼 ‘긴조 9호’로 또다시 구속됐다. 유신 몰락 이후 그는 군부정권 퇴진과 통일운동에 나섰다. 90년 전민련의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6개월간 구속되는가 하면, 87년 전두환 정권 때는 호헌철폐 운동을 벌이다 불구속됐다. 파란과 수난의 나날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목사에게 56년 전 4·19는 아직도 미완성이다. “4·19가 왜 일어났어요. 민주화와 우리 사회의 근본을 상실하다 보니 반민주적이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겁니다. 근본은 쪼개진 한반도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뒤 자주적인 통일 조국을 이루지 못한 부작용과 반작용이 결국은 현대사에서 독재를 허용하고 부정을 불러온 겁니다. 통일을 해야 그런 모든 모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목사는 “4·19 정신이 역사에 길이 빛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뒤늦게나마 부상자 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졌네”라고 말했다. 그의 바람은 오직 한가지다. “전쟁 없는 평화세상을 기원하면서 통일을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조그만 일이라도 하려 합니다.”

수원/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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