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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 대물림’ 끝모를 고통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나요

등록 2016-05-22 19:18수정 2016-05-22 22:16

원폭피해자 2세가 오바마에게 띄우는 편지
27일 일본 히로시마 방문을 앞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쓴 편지(사진)를 한정순(57)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이 <한겨레>에 보내왔다. 한 회장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부모에게서 대물림된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핵 피해자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달라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호소했다.

존경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님께.

저는 한국에 사는 한정순(57)이라는 아줌마입니다. 오바마 대통령님께서 27일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피해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한국 원폭 피해자 2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희 부모는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원폭 피해자이고, 저는 부모에게서 대물림된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원폭 피해자 2세입니다. 원자폭탄이 터질 당시 저희 집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 7명, 언니, 오빠 등 13명의 대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임신 중이셨습니다. 가족들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화상을 입는 등 모두 크게 다쳤습니다.

해방을 맞아 아버지는 모든 식구를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오셨고, 어머니는 귀국 직후 아이를 낳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아이는 곧 죽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6남매를 더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1979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심장병을 앓으셨습니다. 큰오빠는 30대 초반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고, 큰언니도 30대 초반 병명도 모른 채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양쪽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소용없었고, 원인도 알 수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직장을 다녔으나, 다리 통증 때문에 다니다 말다를 반복했습니다.

오빠·언니 30대에 세상 뜨고
저도 어려서부터 병약
오랜 다리통증에 인공관절
아들도 뇌성마비로 태어나
자녀들 고통에 귀 기울여주시길

24살에 결혼해서 다음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건강은 갈수록 나빠지는데, 아이는 선천성 장애를 갖고 있다니…. 시어머니의 차가운 눈초리와 외면하는 남편.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면서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다행히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큰아이의 팔다리는 휘어지고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픈 다리로 아이를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일어설 수조차 없을 만큼 아파 병원을 찾았다가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 판정을 받았습니다. 인공관절 삽입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술비를 친정 형제들이 마련해줬습니다. 수술을 받고 두 달쯤 지나자 다시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미 살림은 기울었고 남편 마음도 멀어진 뒤였습니다. 시어머니도 “병신 아들을 낳은 것도 모자라 니 몸까지 아파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느냐”며 구박했습니다. 결국 이혼을 하고 남편과 헤어졌습니다.

얼마 뒤 셋째 언니도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른 형제들도 심근경색, 어깨관절 수술 등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원폭 피해자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대물림된 피폭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텔레비전 방송을 2002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원폭 피해자 자녀들이 한국원폭2세환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경남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모인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여름인데도 긴팔 점퍼를 입고 목수건까지 감은 남자가 연거푸 기침을 하며 자료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산에 사는 김형률입니다. 어머님이 원폭 피해자이시고, 저는 폐 기능이 일반인의 20~30%에 불과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폐렴 때문에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나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나의 고통이 피폭 후유증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형률씨와 함께해야겠구나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형률씨는 2005년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와 같은 병명으로 수술을 받은 정숙희씨가 뒤를 이어 원폭2세환우회 회장을 맡았고, 제가 총무를 맡았습니다.

3년 뒤 정숙희 회장의 건강이 너무 나빠져 바깥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자, 제가 제3대 회장을 맡게 됐습니다. 원폭2세환우회 일을 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찜질방 청소, 모텔 청소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결국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면서 다시 병원을 찾게 됐는데, 고혈압·우울증·신경장애로 인한 불면증·근이완증·어지럼증·위장병 등 온갖 병명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빈털터리인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옆 침대 환자를 돌보던 간병사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줬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프고 힘든 이들을 도와주자는 생각에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 간병사가 됐습니다. 지금은 환자를 돌보면서, 그들을 통해 저의 병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해 이동이 어려운 원폭 피해 1세대 어르신들이 21일 오전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복지회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합천/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몸이 불편해 이동이 어려운 원폭 피해 1세대 어르신들이 21일 오전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복지회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합천/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세대·3세대 덮친 후유증, 일본도 미국도 한국도 외면

저는 오랜 다리 통증에 인공관절
아들도 뇌성마비로 태어났지만
“의학적 증명 안됐다” 인정 못받아

원자폭탄 터지고 71년
아픈 몸 이끌고 살기엔 너무 긴 시간
자녀들 고통에 귀 기울여주길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
제가 겪은 고통은 원폭2세환우회 다른 회원들의 고통에 견주면 그저 평범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초대 회장이었던 김형률씨는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희귀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다음 회장을 지낸 정숙희씨는 인공관절 삽입 수술 부위가 아물지 않아 아직도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정차시 부회장은 본인에겐 특별한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딸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정숙희씨의 동생 부부도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 원폭 피해자 2세들은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앓고 있는 병이 피폭 후유증이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랍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앓고 있는 이 희귀병은 무엇 때문이며, 끝을 알 수 없는 이 고통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요?

원자폭탄이 터지고 71년이 흘렀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살아가기에 너무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피해자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님께 감히 요청합니다. 원폭 투하 71주기를 맞아 다시는 핵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 온 세상 모든 이들이 마음껏 웃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리고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한 한국 원폭 피해자들과 그 자녀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시기 바랍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27일 히로시마로 찾아가 오바마 대통령님께 직접 하겠습니다. 바쁘시더라도 그날 저를 꼭 만나, 한국의 원폭 피해자와 그 자녀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27일 뵙기를 기약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한정순 올림.

합천/정리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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