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원폭지부 주관으로 원폭피해자 야유회가 21일 오전 경남 합천군 황강 남전교 아래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진 이후 71년간 한국 정부는 국내 원폭 피해자들에게 지원은커녕 피해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합천/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원폭 피해 끝모를 고통
일제때 합천사람들 대부분이
히로시마로 보내져 참극당해
생존자 중 620명 이곳에 살아
매년 봄 황강서 모여 친목도모
국내 유일 원폭피해자복지관도
“한국, 일·미에 배상 등 요구안해
나라가 할일 당사자가 수십년째 싸워”
일제때 합천사람들 대부분이
히로시마로 보내져 참극당해
생존자 중 620명 이곳에 살아
매년 봄 황강서 모여 친목도모
국내 유일 원폭피해자복지관도
“한국, 일·미에 배상 등 요구안해
나라가 할일 당사자가 수십년째 싸워”
지난 21일 경남 합천군 합천읍 황강 남정교 아래 그늘에서 국내 원폭 피해자들의 야유회인 ‘복지증진대회’가 열렸다.
해마다 봄이면 국내에 있는 일본 원폭 피해자들이 이곳 황강변에 모여 서로 소식을 전하며 친목을 다진다. 한때 600명 이상 모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돌아가신 피해자가 늘면서 참가자가 줄어 이날은 300여명이 모였다. 올해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일본 히로시마에 간다는 소식과 지난 19일 처음으로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제정됐다는 소식 때문에 어느 해보다 야유회 분위기가 활기찼다.
이곳에서 만난 윤일남(84) 할머니는 “원자폭탄에 맞아 일본에 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 와서 아무 소용도 없지만, 그래도 사과받을 것은 받아야지. 그런데 피해자들은 여기 합천에 있는데, 미국 대통령은 왜 우리한테 오지 않고 일본 히로시마부터 가는지 모르겠네”라고 말했다. 원폭 때문에 큰오빠를 잃은 이창분(88) 할머니도 “국내 원폭 피해자들이 히로시마로 미국 대통령을 찾아갈 것이라던데, 그렇게 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겠지”라고 말했다.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70%가량이 합천 출신이다. 지난달 말 현재 국내 원폭피해 생존자 2494명 가운데 620명이 합천에서 살고 있다. 심진태(74)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근로정신대 등으로 일본에 간 합천 사람 대부분이 히로시마로 갔다. 1940년대 히로시마에선 ‘한국인을 만나면 고향을 묻지 마라. 어차피 합천 사람이니까’라고 할 만큼 합천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날 원폭 피해자들은 “나라가 해야 할 일을 피해 당사자인 힘없는 국민들이 대신 나서 수십년째 싸우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둘째 동생(77)과 함께 살고 있는 김도식(81) 할아버지는 “한국 국회와 정부는 썩어도 너무 썩었어요. 수만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원자폭탄에 맞아 죽거나 겨우 목숨만 건진 채 거지가 돼서 돌아왔는데, 지난 70년간 일본과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지도 배상을 요구하지도 않았잖아요.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 우리 원폭 피해자들만 불쌍할 뿐이지”라고 말했다.
70년 넘게 국내 원폭 피해자 문제가 부각되지 않은 배경으로는 ‘미국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해 우리가 해방됐다’는 믿음이 꼽힌다. 언론은 해마다 8월6일을 전후로 원폭 피해자들을 부각시키다가 8월15일 광복절이 되면 관심을 끊는다. 어쨌든 광복이 됐으니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터뜨린 것을 두고 우리가 잘했다 잘못했다 잘라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인식이다. 한-미 동맹의 핵우산도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원폭 피해자 배상을 미국에 강하게 요구해 미국을 핵무기 공격 가해자로 몰면, 한반도 유사시 미국 핵무기에 기대는 핵우산의 명분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1996년 10월 문을 연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는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희망하는 원폭 피해자들이 모여 산다. 원폭 피해자들이 모여서 지낼 수 있는 국내 유일한 시설이다. 건립비용 40억엔 전액을 일본 정부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했고, 한국 정부는 운영비를 부담하고 있다. 최대 110명이 함께 지낼 수 있는데, 현재 103명이 살고 있다.
복지회관 뒤뜰엔 숨진 원폭 피해자 1055명의 위패를 모신 위령각이 있다. 1997년 일본 시민단체 태양회가 세운 것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진 8월6일에 해마다 위령제가 열리는데, 2010년까지는 위령제 비용도 태양회가 부담했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김도식 할아버지는 1945년 소학교 3학년 때 피폭됐다. 그는 “이사를 가려고 8월3일 학교에 전학계를 내고 집에서 며칠 지내고 있었는데, 8월6일 원자폭탄이 터졌다. 내가 다니던 소학교는 완전히 부서졌다. 전학계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1학년이던 첫째 동생과 함께 학교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귀국 이후 김 할아버지의 부모는 모두 암에 걸려 사망했다. 누나와 막내 동생도 암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는 피폭 후유증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 회관에서 1999년부터 지내는 김일조(88) 할머니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나쁘고, 원자폭탄을 터뜨린 미국도 나쁘다. 나 죽기 전에 그들로부터 잘못했다는 사과를 꼭 받고 싶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2살 때 히로시마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만난 합천 출신 남편과 1944년 결혼했고 다음해 피폭됐다. 김 할머니는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번쩍하며 엄청난 폭발음이 났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지”라고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집은 그대로 폭삭 무너졌고, 온 가족이 건물 더미 아래에 깔렸다. 불빛을 찾아 밖으로 겨우 기어 나왔을 때, 길거리에는 사방에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김 할머니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수한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사무국장은 “피폭 후유증이 심한 원폭 피해자들은 이미 모두 사망했고, 이제는 피폭 후유증이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각종 노인성 질환을 앓는 피해자들만 남았다. 어떤 경우라도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합천/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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