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순(57·여) 한국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은 8남매 중 일곱째로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중학생 때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리 통증에 시달렸고, 결국 20대 중반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 판정을 받아 양쪽 다리에 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받았다. 그의 형제들 역시 모두 건강하게 태어났으나, 자라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젊어서 목숨을 잃거나 지금도 불치병을 앓고 있다. 한씨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가 있었다.
한씨는 원자폭탄 피폭자 2세다. 그의 부모는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질 때 피폭됐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져 해방 직후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해방 이후 태어난 한씨 형제들과 이들의 일부 자녀는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원폭 피해자들이 많이 살아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에 가면 해방 이후 태어났지만 후유증을 앓는 피폭 2세와 3세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2013년 경남도가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조례’에 따라 도내 원폭 피해자 실태를 조사한 결과, 해방 이후 태어난 피폭 2세의 23.4%와 이들의 자녀인 피폭 3세의 13.9%에게서 선천성 기형 또는 유전성 질환이 발견됐다. 아직 발병하지 않았거나 발병 사실을 숨기는 사람까지 고려한다면 유병률은 더 올라갈 것이다.
일본과 한국 정부는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유증의 대물림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사능에 노출되면 후유증이 대물림 된다는 것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피폭 2세·3세들이 증명하고 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후쿠시마 주민들의 기형아 출산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 언젠가 죽는다는 운명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늙어 죽을 수도 있지만, 병들거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스스로 생명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원폭이나 원전 사고로 방사선에 노출되면 설사 목숨을 건진다 해도,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고통에 빠지게 된다.
최근 원자력발전소 밀집지역 인근인 경주에 지진이 발생하면서, 원전 방사능 유출 사고의 위험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까지 대대로 헤어날 수 없는 무간지옥에 빠질 것이라는 점은 무시되고 있다.
일주일 너머 원전 주변 지역에서 여진이 이어지는데, 관계 당국의 “안전하다”는 무한반복 설명은 세월호 참사 때 들었던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큼이나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기가 끊겨 석기시대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내 자식과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을 생각한다면 원전의 위험성을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최상원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