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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박정희 정권, 부마항쟁때 서울에도 계엄령·군투입 계획”

등록 2016-10-17 16:18수정 2016-10-17 20:13

지주형 경남대 교수, 미 국무부·CIA 보고서 분석
“육군 3개 보병사단 서울 진입 위해 비상 대기”
당시 서울·대구·광주 등 전국서 반정부시위 확인도
미국은 김영삼 인터뷰 막는 등 민주주의 유린 방관
1979년 10월 부산마산민주항쟁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자 부산시청(부산 중구 중앙동) 앞에 탱크들이 배치됐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마산민주항쟁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자 부산시청(부산 중구 중앙동) 앞에 탱크들이 배치됐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철권통치가 18년 만에 끝나는 데 주요한 구실을 한 부산마산민주항쟁(부마항쟁) 당시 정권이 서울까지 계엄령을 검토하고 군대를 투입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 정권에 대항한 시위가 부산과 마산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서울 등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를 벌이거나 계획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지주형 경남대 교수(사회학)가 미국 국무부 문서와 중앙정보국(CIA) 보고서 분석을 통해 확인했다. 그는 지난 15일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린 부마항쟁 37돌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런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두 자료를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먼저 1979년 10월18일 부산에 계엄령, 20일 마산에 위수령이 내려진 것과 별도로 1군단 30보병사단·3군 20보병사단·4군단 26보병사단 등 육군 3개 보병사단이 수도방위사령부 통제 아래 비상대기 한 것으로 드러났다. 모든 장병이 공포탄을 받았고 서울에 계엄령이 내려지면 서울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 보안사령부는 군인들과 학생들의 접촉을 막기 위해 전방 부대의 휴가와 통행증을 취소했다. 부산과 마산의 시위가 서울로 북상하면 계엄령 선포와 함께 군이 서울 시내를 접수하려 한 것이다.

10월16~20일 부산·마산에서만 시위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16일 서울 이화여대생 500명이 3시간 동안 교내시위를 벌였다. 17일 광주 전남대 학내 시위는 실패했다. 주모자들을 강제로 수학여행을 떠나게 하고 집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어 18일 경남 진주에서 경상대 학생들과 고교생,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서울대에선 30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부산과 마산의 시위가 진압된 20일 이후에도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25일 대구 계명대생 1000여명이 교내시위를 벌이자 휴교령이 내려졌다. 경북대와 영남대도 시위를 막기 위해 휴교했다. 같은날 연세대에선 “부산에서 17~19일 10만명이 참여한 대중시위가 발생하고 마산의 대중시위가 이를 뒤따랐다. 29~30일 대학도서관 앞에 모이자”는 내용의 홍보물 3000장이 뿌려졌다. 이화여대 학생들도 29~30일 시위를 계획했다.

지 교수는 “부마항쟁이 서울 등 다른 지역에도 학생운동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만약 10월26일 박 대통령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서울 등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대되고 심화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미국 국무부 문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난 1979년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텔레그램)과 미국 국무부가 주한 미대사관과 다른 지역 대사관에 보낸 문건이다. 이들 문서는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가 1997년 출간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자료총서> 7권에 수록됐다. 7권의 392~482쪽에 부마항쟁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10월16~28일의 기록을 적은 미국 국무부 자료가 69쪽에 걸쳐 실려 있다.

미국 애틀란타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도서관에서 발견된 중앙정보국의 부마항쟁 보고서는 박 대통령 암살 관련 문서에서 15쪽 분량을 차지한다.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이 2007~2008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출장을 통해 입수했다.

1979년 10월 부산대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군인들이 출입을 막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대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군인들이 출입을 막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대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인 뒤 어깨를 서로 걸고 부산 동래구 온천장 도로를 지나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대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인 뒤 어깨를 서로 걸고 부산 동래구 온천장 도로를 지나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 동아대 교문 앞에서 군인들이 출입을 막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 동아대 교문 앞에서 군인들이 출입을 막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의 시민들이 계엄 포고문을 읽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10월 부산의 시민들이 계엄 포고문을 읽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미국은 부마항쟁이 격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10월18일 해롤드 브라운 미 국방부장관과 함께 박 대통령을 만나 “우리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미국의 공개적 성명이 한국에서의 갈등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 국무부에 두 차례 전문을 보내 “우리의 행동으로 사태를 악화시켜서는 안된다. 미국의 성명은 부산과 마산에서 선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언론 브리핑에서 질문이 나오면 사실만 언급하라”고 권고했다. 부마항쟁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은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탱크까지 동원하며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군사정권을 묵인한 것이다.

미 국무부는 부마항쟁의 격화를 우려해 워싱턴의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에 10월18일 방송 예정이던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인터뷰 중지를 요청했고 결국 인터뷰는 방송되지 못했다.

지 교수는 “부마항쟁은 지역에 상관없이 유신체제와 군사정권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었고 1987년 민주화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은 군부독재의 종식과 민주화 투쟁의 시작점으로 재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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