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숨진 울산의 한 ‘풀뿌리 민주투사’를 소개한 책자가 나왔다. 장성운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이 최근 펴낸 단행본 <민주화의 중심에서>(범아인쇄)는 박정희 군사독재기인 1960~70년대 울산에서 면의원과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부정과 독재에 맞서다 44년여의 짧은 생을 마친 고 정계석(1934~1978)씨의 40주기를 앞두고 그의 삶을 정리한 추모평전이다. 한화갑 전 국회의원과 심완구 전 울산시장 등 19명의 인사가 쓴 추모사도 함께 담았다.
울산 북구 천곡동의 속칭 ‘속심이’ 마을에서 태어난 정씨는 1960년 26살에 울산 최연소로 당시 제3대 울산군 농소면의원으로 선출돼 지역 정가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일부 면 직원과 이장들에 의한 비료 부정수급 문제를 발견하고 시정을 촉구해 주목을 받았다.
정씨는 1971년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이 맞붙은 제7대 대선 때엔 부정 개표 현장을 적발해 폭로했다. 당시 신민당 울산시 지구당 총무부장으로 개표 과정을 참관하던 그는 울산 방어진 제1투표구에서 개표가 끝나갈 무렵 선거관리위원장이 박정희 후보를 찍은 표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집어넣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개표 중지를 요청하고 위원장을 투표함과 함께 트럭에 태워 울산 시내로 나간 뒤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규탄대회를 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 비상계엄이 선포된 뒤 그는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의 울산 지구당 수석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부산 국군 보안사로 끌려갔다. 그는 당시 박 대통령 비난 전단을 살포했다는 혐의로 몇 차례나 실신할 만큼 혹독한 전기·고춧가루·물고문과 구타 등을 당했다. 이어 군사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5년 뒤 1978년 2월 숨지고 말았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는 2001년 8월 정씨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저자인 장씨는 “유신은 당시 사회 배경으로 보면 박 정권이 정권 연장을 위해 일으킨 쿠데타였다. 울산 야당의 많은 인사가 이에 항거한 것은 당연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계엄사에 불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 중심에 정씨가 있었다”고 평했다.
신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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