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군 장안읍 좌동리 중입자 치료센터가 지난해 5월 완공됐지만 아직까지 텅 비어 있다.
2010년 4월19일 부산시청에선 의미 있는 협약식이 열렸다. 이종인 한국원자력의학원장, 허남식 부산시장, 최현돌 기장군수가 의료용 중입자가속기 개발에 함께 나서겠다며 손을 맞잡았다. 3자는 협약서에서 2015년까지 국비 700억원, 부산시와 기장군 각 250억원, 한국원자력의학원 750억원 등 1950억원을 투자해 부산 기장군 장안읍 좌동리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옆에 중입자 치료센터를 완공하자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6년 9개월이 흐른 지난 20일 오후 부산 기장군 중입자가속기 치료센터를 찾았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옆에 새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니 지상 2층 높이 건물이 나왔다. 국내 최초의 중입자 치료센터다. 건물 안엔 관리직원 몇 명만 보였다. 방사선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막은 1층 치료실 3곳은 텅 비어 있었다.
1층 치료실에서 60여m를 더 들어가니 가로 30m, 세로 33m, 1000㎡ 면적의 커다란 방이 나왔다. 이곳에 중입자가속기가 들어와야 하지만 콘크리트 기둥 2개만이 천정을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
중입자가속기는 탄소원소를 몸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암세포에 정확히 충돌시켜 암세포를 파괴하는 첨단 의료기기다. 원형 가속기에 중입자를 넣고 빛 속도의 70%로 가속해서 살 속 깊이 25㎝까지 빔(선)을 쏜다. 일반 방사선 치료에 견줘 치료 기간은 2~3개월에서 1~4주, 치료횟수는 30~40차례에서 1~16차례로 단축된다. 2009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예비타당성 조사보고서는 두경부암(뇌 아래에서 가슴 윗부분 사이에 발생한 암)·폐암·간암·전립선암·골육종암·자궁경부암·직장암·두개저암(두개골 아래쪽에 발생한 암) 등 8대 암 3~4기 환자는 일반 방사선 치료 대비 5년 생존율이 23% 이상 증가한다고 밝혔다. 폐암 1기 환자는 5년 생존율이 15%에서 95%, 간암은 23%에서 90%, 골육종암은 33%에서 80%로 늘어난다.
중입자 치료센터 1층의 한 공간. 중입자가속기가 이곳에 들어와야 하지만 예산이 없어서 텅 비어 있다.
치료비가 몇천만원이나 하는 것이 흠이지만 한국원자력의학원은 현재 일본 4곳, 독일과 중국 각 2곳, 이탈리아 1곳 등 4개국 9곳에서만 중입자가속기를 상업 운영하는 것에 주목했다. 현재까지 4개국 9곳에서 상용하고 있는 중입자가속기가 싱크로트론형인데 싱크로트론형보다 작고 사용이 편리한 사이클로트론형에 눈을 돌리고 2011년 6월부터 본격 연구개발에 나섰다. 세계 최초로 사이클로트론형 중입자가속기를 개발해서 세계 중입자가속기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원자력의학원은 2014년 5월 싱크로트론형으로 변경했다. 3년 만에 기종을 바꾼 것이다. 국내외 가속기 전문가들이 암 치료 목적으로는 임상시험조차 한 적이 없는 사이클로트론형보다는 1994년부터 실전 응용되고 있는 싱크로트론형이 더 적합하다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기종을 바꿨지만 이번엔 싱크로트론형 중입자가속기를 살 돈이 부족했다. 부산시와 기장군이 각각 250억원씩 500억원을 내고 미래창조과학부도 500억원을 지원했지만 한국원자력의학원은 협약에서 분담하기로 한 750억원 가운데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한국원자력의학원은 지난해 12월 750억원 투자 유치를 위해 중입자 치료센터를 공동운영할 병원을 찾는 모집공고를 냈지만 응모한 곳이 한 곳도 없었다. 이에 한국원자력의학원은 지난 13일 750억원을 투자하면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의 경영을 10년 동안 맡기고 중입자가속기 소유권을 넘기는 2차 모집공고를 냈다.
2차 모집공고에서 극적으로 750억원을 투자할 병원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상업 치료는 애초 2016년에서 2021년으로 5년 늦어지게 됐다. 꿈의 암 치료기를 기다리고 있는 암 환자와 가족들의 희망 고문이 더 연장된 것이다.
다음달 23일이 기한인 2차 모집공고에서도 투자할 병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원자력의학원이 750억원을 마련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부산시, 기장군이 750억원을 추가로 지원하지 않으면 지난해 5월 완공한 중입자 치료센터 건축비 600억원 등 투자비 1000억원은 허공에 날아갈 가능성이 커진다.
부산시와 기장군은 난감해하고 있다. 부산시 관계자는 “한국원자력의학원이 협약을 어긴 것인데 협약이 구속력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원자력의학원 관계자는 “자치단체는 먼저 상업 치료를 요구하고 연구개발은 늦어져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국내 방사선 의학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었다면 정부가 책임지고 관장하는 사업으로 추진해야 마땅했다. 정부는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의 위탁경영을 철회하고 대안과 지원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글·사진/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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