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담담
전북연구원 문화관광연구부 연구위원 밀려드는 일 때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던 몇 해 전, 한 선배가 ‘그러다 네 몸이 소진되겠다’며 걱정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을 할까’ 스스로 되물으면서도 일이 적어지면 불안했다. 열심히 일해야 본분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이 없는 것보다 많은 게 좋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개인을 보호해 주는 공인된 장치가 있었다. 공동체가 와해되고 파편화되면서 이제는 ‘공인된 처방’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선택에 따른 위험부담은 오롯이 개인 몫이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 더 불안해하며,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데 노력하기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린다. 주말을 잊고 일에 매달리는 월화수목금금금. 좋게 말해 젊어서 고생이고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 사실은 성과사회의 자기 착취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원리인 자기 착취는 타자 착취보다 효과적이다. 자기 착취는 강제적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현대인은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한다. 독일의 학자 한병철은 자기 착취의 성과사회를 ‘피로사회’로 부른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의 석학 푸코가 말한 ‘규율사회’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규율사회의 통제수단인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피로사회에서는 프로젝트, 자발성, 동기부여가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노’가 지배적이지만 피로사회에서는 ‘예스 아이 캔’이 지배한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규율사회를 벗어나면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피로사회는 낙오자를 만들어내고, 질식·소진 끝에 신경성 질환을 퍼뜨린다.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공황장애 등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다. 한병철이 말하길 피로사회에서 나타난 ‘긍정성의 과잉’으로 생겨난 질병이다. 한마디로 ‘예스 아이 캔’을 부르짖는 자기 착취의 결과다. 피로사회의 질병은 사회구조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면역학적 기술로는 다스려지지 않는다. 무너져버린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가면서 강한 신뢰관계를 구축하여 존재론적 안정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문화의 공익적 가치가 있다. 문화는 상호이해와 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 공동체성을 되살린다. 문화는 곧 공동체다. ‘문화융성’은 그런 점에서 정말 반가운 정책이었다. 이전 정부에서 이토록 문화에 관심을 두었던 적이 없었고, 이토록 많은 이들이 문화가 왜 중요한지를 논의한 적이 없었다. 지금껏 개발에서 보조재로 활용되던 문화가 이제야 본원적 가치를 되찾을 수 있겠구나 기대했다. 문화융성을 연구하고 실행계획을 짜는 데 머리를 맞댔던 이들이 지금은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다. 문화융성이라는 말만 거창했지 결국 문화는 국정농단과 사익을 위한 들러리였다. 좋은 성과를 낸 사업마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문화예산이 크게 줄어들고 아예 문화체육관광부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어, 문화융성을 반겼던 이들의 걱정이 갈수록 깊다. 문화융성이라는 말은 새정부에서 사라질 게 뻔하다. 문화융성이 사익에 이용된 것은 용서할 수 없으나, 말은 바뀌어도 가치는 이어졌으면 좋겠다. 문화가 돈이 돼서는 아니다. 피로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사회복지는 시장중심 자본주의 위기에서 불거진 실업, 산재 등의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여 등장했다. 문화는 우울증, 자살과 같은 피로사회의 사회적 위험을 해결하는 핵심이다. 그래서 다시 문화여야 한다. 문화정책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크나, 그래도 희망한다. 문화가 현대인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말이 말로만 끝나지 않길, 그래서 새 정부에서 문화가 ‘정말’ 융성하기를 다시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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