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청남대에 1000만번째 관람객이 입장하자 청남대 관리사무소 직원 등이 축하하고 있다.
청와대는 주인이 바뀐다. 하지만 주인이 바뀌지 않는 청와대도 있다. 남쪽 청와대 ‘청남대’다. 2003년 이후 청남대는 국민이 주인이다.
청남대가 17일 관람객 1000만명을 기록했다. 충북도는 17일 오전 박찬영(20·세종시 달빛로)씨가 청남대 1000만번째 입장객이 됐다고 밝혔다. 박씨는 청남대 1년 무료관람권 등 선물을 받았다. 박씨는 “대통령 별장이던 청남대를 방문하고 예상치 못한 행운도 얻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2003년 4월18일 정부는 청남대 소유권을 충북도로 넘겼고, 이날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그해 7월15일까지 무료 개방에 이어 같은 해 8월16일부터 유료 관람을 시작해 13년10개월 만에 1000만 관람객을 기록했다. 한해 평균 70여만명, 하루 평균 2357명이 청남대를 다녀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4월18일 청남대를 시민에게 개방하면서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개방 안 했을 텐데…. 2003년 4월18일 아침 식사 뒤 노무현 대통령은 자전거에 올랐다. 대청호를 따라 흐드러진 벚꽃이 눈처럼 날렸고, 낙우송 이파리는 깃털처럼 흙길에 앉았다. 그리고 오전 10시 청남대 개방식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미리 알았다면 개방 안 했을 겁니다.” 그의 농담에 문의면 주민 등 참석자 800여명의 환호와 박수, 웃음이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저는 이 별장을 국민 여러분께 돌려드립니다. 사사로운 노무현을 버리기 위해서입니다”는 글도 남겼다. 청남대가 자리하고 있는 청주시 문의면 32개 마을 이장단과 주민 5800명은 개방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돌 5800개로 원형 돌탑을 쌓아 노무현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노 대통령은 없지만 그와 국민을 잇는 돌탑은 지금도 청남대 본관 앞을 지키고 있다.
오효진 청원군수(오른쪽 안경)가 지난 2003년 4월18일 청남대 개방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청원군 문의면 주민들이 선물한 돌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청남대는 그렇게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청남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1983년 6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27일 준공했다.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신대리지만 멀리선 지금도 존재를 알 수 없다. 삼면에 펼쳐진 대청호와 옥새·월출·소위·작두봉 등 네 봉우리가 알을 품듯 안고 있는 천하 명당으로 꼽힌다.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1급 보안 지역이었다. 청남대에서 일하는 이들과 몇몇 고관대작들을 빼고는 존재조차 몰랐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주변 현암사에서 청남대 쪽을 가리키며 “천 년 뒤 물이 차고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듯 국토의 중심이요, 연화정수의 성지가 이룩돼 국왕이 머물 지형”이라고 예언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 축구, 골프, 조깅, 산책 청남대는 330필지 184만㎡에 건물만 46동이다. 이런 곳에 어떻게 이 공간이 들어섰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반송·백송·금송 등 나무 124종 11만6천그루, 무화과·인동초·벌개미취 등 들꽃 143종 35만포기, 멧돼지·고라니·너구리 등 야생동물까지 서식하고 있는 자연 박물관이다. 군인들이 그야말로 ‘칼같이’ 관리한 데다 외부의 손을 타지 않은 탓이다.
조성 초기 봄을 맞이한다는 뜻을 담아 ‘영춘재’로 불렸지만, 1986년 집무 공간 개념을 더해 ‘남쪽의 청와대’란 뜻의 청남대로 개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등 굵직굵직한 정책을 내놓기 전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가다듬었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청남대 구상’이란 말도 나왔다.
전 전 대통령부터 단 하룻밤만 묵은 노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6명이 모두 89차례 청남대를 찾아 366박472일 머물렀다. 역대 대통령들은 잠깐 들러 휴가를 보냈지만 청남대엔 여전히 그들의 추억이 곳곳에 오롯이 남았다. 청남대 탄생 때부터 지금까지 청남대를 지키고 있는 김찬중(52)씨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골프를 특히 좋아했다. 대통령께서 골프할 땐 군인 등은 식사 때도 산으로 돌아가는 등 군댓말로 기도비닉을 유지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조깅, 김대중 대통령은 산책, 노무현 대통령은 자전거가 기억에 남는다. 대통령 기념관 등에 그분들의 추억·역사·기록·손때가 남았다”고 했다.
■ 박근혜 대통령 길 탄생하려나 청남대는 역대 대통령들의 이름을 딴 산책로를 조성했다. 전두환대통령길(1.5㎞·30분)은 본관에서 출발해 제법 가파른 오각정을 지나 대청호변을 따라 양어장까지 이른다. 전 대통령은 겨울철 양어장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노태우대통령길(2㎞·40분)은 전 대통령 길을 이어 주로 대청호변을 평탄하게 걸을 수 있다. 대통령 바통을 이어받은 둘의 인연이 떠오른다. 김영삼대통령길(1㎞·30분)은 가로숫길이다. 김 대통령은 머물 때마다 이곳을 2차례씩 오가는 조깅을 즐겼다.
김대중대통령길(2.5㎞·60분)은 645계단을 오르고, 출렁다리 고비를 만나는 등 산책이라기보다 등산에 가까울 정도로 험난하다. 파란만장 자체인 그의 인생이 느껴진다. 김 대통령은 길 출발점인 배 밭을 자주 찾았으며, 끝부분 초가정은 하의도 고향집 정경을 복원한 것이다.
노무현대통령길(1㎞·20분)은 두 김 대통령 사이 산속에 조성돼 있어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다. 2013년 1월 개장한 이명박대통령길(3.1㎞·90분)은 가장 길다. 이 대통령은 길 개장식 때 이곳에 들렀다.
청남대는 박근혜 대통령길 조성도 검토하고 있다. 1~2곳 정도를 후보지로 살피고 있다. 노정호 청남대 운영과장은 “청남대를 다녀간 역대 대통령의 길을 만드는데 박 대통령은 아직 다녀가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토는 하고 있으며, 탄핵 정국이 마무리되면 충북도, 청와대 등과 상의를 해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황금 수도꼭지 좀 보자 관람객 1000만명 다녀가는 사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개방 초기만 해도 ‘청남대 황금 수도꼭지’가 단연 화제였다. “대통령이면 과거 임금이잖아. 얼마나 화려하겠어. 수도꼭지, 욕조 등이 모두 황금이래….” 명백한 ‘오보’다. 청남대 어디에도 황금으로 된 수도꼭지·욕조·세면대·손잡이는 없다. 한때 지하를 깊게 파고 대청호 물을 끌어들여 수족관을 만들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역시 낭설이다.
본관 아래 위층에 경호원과 대통령 자녀, 부모 등이 머무는 침실이 10여곳 있다. 간단한 회의 등 집무를 할 수 있는 소회의실이 있고, 식당·주방·화장실 등 여느 가정집과 다름없는 생활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대통령 부부의 공간인 침실에는 침대와 텔레비전, 탁자 등이 있고, 서재엔 책이 100권 정도 꽂혀 있다. 접시·그릇 등도 대통령과 영부인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바꿨을 뿐 대부분 물려 썼다. 실제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가 주문한 한 업체의 가구는 대물림했으며, 침구류·운동용품·전자제품 등도 일반인들이 쓰는 국산품이 대부분이다.
김찬중씨는 “호기심으로 왔다가 ‘애게 이 정도야. 대통령도 별거 아니구먼’하고 실망하는 분들도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소박하게 쉬다 갔다”고 말했다.
■ 청남대 이젠 국민 관광지로 청남대는 지난해 문화관광부 선정 ‘한국 관광 100선’이 됐다. 봄엔 영산홍·벚꽃, 가을엔 국화 등이 흐드러져 꽃 대궐을 이룬다. 또 지난해 말에 조성한 무궁화동산(8000㎡)엔 5종 2416그루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다. 호사스런 볼거리보다, 조용히 느끼는 공간으로 체질 개선하고 있다. 대통령 기념관, 대통령 광장 등 역대 대통령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 속속 들어섰다.
청남대는 올해부터 문턱을 더 낮춰 시민들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먼저 ‘무장애 대통령 길’ 조성에 나선다. 본관에서 출발해 양어장까지 이르는 전두환 대통령 길(1.5㎞)을 유모차, 휠체어 등도 편안하게 오갈 수 있게 새 단장 할 참이다. 유아·어린이·장애인·노인 등도 편하게 길을 오갈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 길 곳곳에 역대 대통령이 좋아했던 꽃·풀 등을 갖춘 대통령 테마 숲도 조성해 나갈 생각이다.
윤상기 청남대 관리사업소장은 “우러러볼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아니라 국민 곁에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대통령 이미지 조성을 위해 무장애 길을 만들기로 했다. 연차적으로 다른 대통령 길로 확대해 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청남대의 숙제도 있다. 한 번 다녀간 관광객을 2~3번 다시 오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충북도는 청남대를 둘러싸고 있는 대청호의 각종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윤 소장은 “올해 90만~100만명의 관람객을 예상하며, 이들이 찾으면 입장 수익으로도 운영·관리에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청남대가 장기적 관점에서 명실상부한 국민 휴양지로서 발돋움하려면, 일정 정도 규제 완화가 이뤄져야 투자·개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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