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3·1절 28주년 기념대회였어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참가했어요. 초등학생들도 모두 참가했습니다. 머리에 띠 두르고 16절지(A4 용지) 크기의 종이에 태극기를 그려 대나무 가지에 붙여 ‘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1947년 3월1일 이른바 ‘3·1사건’ 당시 제주남초등학교 4학년이던 송영호(82·제주시 도남동)씨는 31일 70년 동안 마음 속 깊은 곳에 꾹꾹 감춰놓았던 ‘그 날’의 일을 풀어냈다. 제주4·3연구소가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연 ‘4·3 증언본풀이마당’에서다.
그때 나이 12살. 어린 나이였지만, 워낙 생생한 일이어서 머릿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관덕정 광장 오른쪽에 식산은행이라고 있었어요. 그곳 울타리에서 아버지는 행진을 구경하는 중이었고, 저는 시가행진을 하는 도중에 총소리가 들렸지만, 처음에는 무슨 총소리인지 몰랐어요.”
이날 평화행진은 인근의 제주북초등학교에서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열린 3·1절 기념대회 이후 이뤄졌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8만여명인데, 신문에는 2만5천~3만여명이 모였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초등학교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기마경찰이 말을 타고 오는데 어린아이가 말발굽에 치였는데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때 농업학교 학생들이 남문통에서 중앙성당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경찰이 치고 그냥 가는 것을 학생과 어른들이 본 겁니다. 군중들이 ’와’하면서 항의했어요.”
그 순간 경찰서의 망루와 길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이때의 발포사건으로 초등학생과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 송씨의 부친 송덕수(당시 47)씨 등 6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이 사건 직후 미군정은 뭍에서 경찰을 급파해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나섰고,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의 테러가 자행되면서 이듬해인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로 확대됐다.
“시가행진이 끝나 학교로 돌아갔는데 담임 선생님이 ‘너희 아버지가 총에 맞았다’고 했어요. 인근 도립의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님이 피를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물을 찾더군요.”
제주4·3 69주년을 맞아 1947년 3월1일 이른바 ‘3·1사건’ 때 부친을 잃은 송영호(82)씨가 31일 70년 만에 부친의 희생 경위를 증언하고 있다.
결국 그의 부친은 병원에서 숨졌다. 도남마을 청년들이 아버지의 주검을 들것에 싣고 마을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제주 풍습에는 밖에서 사람이 죽으면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는다. 그의 백부는 동생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겨 밭에 모셨던 주검을 집안으로 모시게 한 뒤 장례를 치렀다.
“아버님은 은행 옆에서 구경하다가 총알이 팔로 해서 배를 관통한 것 같았습니다. 불과 50m도 떨어지지 않은 경찰서 망루에서 발포가 이뤄졌지요. 공포를 쏜 것이 아니라 조준사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당국의 사과는 없었습니다.”
당시의 기억을 꺼내는 송씨의 입술은 떨렸다. “기뻐하고 만세를 불러야 하는 날에 그런 불상사가 있다는 것이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 용서는 할 수 있는데 조상이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간 사실을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송씨는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제주도립의원 부근에 살던 양유길(82·여·제주시 이호동)씨는 당시 제주북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북초등학교 행사장에서 청년들이 먼저 나가고 우리는 마지막에 나가는데 총소리가 났어요. 누군가가 ‘뛰어라’하는 소리에 나와 친구는 미군이 위로 총을 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식산은행 옆에서 탁 쓰러지는 것을 봤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에서 공부를 시켜주기로 했던 큰오빠(양해길)는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고, 작은 오빠(양묘길)는 정뜨르비행장(제주공항)에서 총살됐다. 양씨의 부모는 4·3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은 뒤 제주도가 싫다며 제주를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양씨는 10여년 전 뿌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대가 끊겨버렸어요. 아버지는 양자도 삼지 않았지요.”
제주4·3 때 부모와 형제자매 등 가족 9명을 잃은 허영회(84·제주시 일도동)씨는 “눈물도 덜 서러워야 난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컴퓨터가 낡아가듯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종이에 직접 써온 글을 읽은 허씨는 당시 제주화북초등학교 6학년으로 북초등학교에서 열린 기념식을 구경하러 2시간 넘게 걸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초토화 시기인 1949년 1월8일에 머물러 있다.
“화북에서는 보초막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토벌대가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 따로 끌고 가 총살했어요. 아버지, 어머니, 큰 형, 큰 누나, 작은 누나 모두 5명이 한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총살한 다음 날, 가서 찾아 묻으라고 해서 사촌 형은 큰 형 있는 곳으로 가고, 나와 오촌 숙모는 어머니와 누님 있는 곳으로 갔어요. 어머니는 시체들 쌓여 있는 위에 꼬부라진 채로 있는데 복부에 총상이 아니라 창으로 입은 상처였어요. 장기가 나올 정도로…”
허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촌 형이 수습하러 간 큰 형은 한쪽 눈이 훼손됐다고 했다. 산으로 피신한 형제와 매형까지 합치면 4·3 때 모두 9명이 희생됐다. 부모를 포함해 5명을 하루에 장례를 치렀다. “부모님 장례식을 치르면서 술 한잔 올릴 때야 눈물이 납디다. 누워 뒹굴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허씨의 힘든 증언은 여전히 70여년 가까이 지난 4·3이 현재진행형임을 알려주었다.
이날 행사장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이 찾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힘을 보태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며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해야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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