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주년 제주4·3추념식이 열린 지난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지석에서 한 유족이 경인지역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희생자를 기리고 있다.
제주4·3 당시 법률적 절차를 거치지 않거나 형식적 절차만을 거친 채 수감 생활을 한 이른바 ‘4·3 수형인’들이 70여년 만에 재심을 청구한다.
4·3도민연대는 4·3 당시 군사재판으로 인해 억울하게 수형생활을 경험한 18명의 생존자와 함께 오는 19일 제주지법에 ‘4·3 수형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청구’를 신청한다고 17일 밝혔다.
이번 재심청구 청구인에는 4·3 당시 전주형무소 생존자(9명)와 인천형무소 생존자(6명), 대구형무소 생존자(2명), 서울 마포형무소 생존자(1명) 등 모두 18명의 생존자가 참여한다. 도민연대는 “이번 재심청구가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저질러진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70년 만에 사법적 판단을 구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19일 오전 11시 제주지법 앞에서 재심청구서 제출 기자회견을 연 뒤 법원에 접수할 예정이다.
지난 2007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개정된 뒤 신고한 수형인은 모두 302명이다. 이 가운데 2011년 1월과 2014년 5월 2차례에 걸쳐 모두 245명이 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에서 4·3 수형희생자로 결정됐다.
4·3도민연대가 지난달 28일 제주시 하니호텔에서 연 ‘4·3역사 증언 및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에서 증언한 현창용(86)씨는 혐의도 모른 채 끌려가 징역 5년을 살았다고 말했다. 1948년 당시 16살이던 그는 “제주시 노형동 집에서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어머니와 함께 경찰에 끌려가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그곳에서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살려면 경찰이 말하는 대로 시인하라’고 해서 그냥 대답하고 살아남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제주4·3 당시인 1948년과 1949년 군사재판이나 일반재판의 형식을 거쳐 수감 생활을 한 제주도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죄명이나 형량도 몰랐다. 일부 생존자들은 아예 재판을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하거나 수십명씩 한꺼번에 재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난 2002년 제주4·3연구소가 펴낸 증언집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인들>에는 “아무개 마을이 불타는 것을 봤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수형 생활을 했으나, 형무소에 이송돼 한참 지난 뒤 15년형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됐고, 7년6개월 동안 수감 생활한 뒤 석방된 경우도 있었다. 4·3 당시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은 2500여명, 일반재판을 통한 수형인은 1300여명에 이른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