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주4·3 제69주년 추념식에 참석한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허호준 기자
“선거 때마다 4·3 문제 완전 해결을 약속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후보자들은 다 잘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후보 시절의 공약만 돼서 문제지요.”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김춘보(71)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4·3사건이 일어나던 해 두살이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 어머니한테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형무소로 끌려갔고, 그 뒤로 두 분의 소식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 김씨는 “희생자 배·보상 문제는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데 배·보상이 되지 않더라도 사건의 진상을 사실대로 밝혀서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의 명예라도 회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4·3유족회 배보상특별위원장이자 행방불명인 유족인 송승문씨는 “후보들이 공약한 것을 그대로 실행하면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바랄 것이 없다. 희생자 배·보상도 중요하지만 유해발굴도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4·3 문제 해결은 지방선거에서부터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가장 뜨거운 선거 공약 가운데 하나다. 이번 대선에서도 진보 보수 후보 가릴 것 없이 모두 4·3문제 해결을 공약하고 나섰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첫 번째로 내세운 제주 공약도 4·3문제 해결이다. 문 후보는 “4·3은 제주의 오늘이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다”며 4·3문제 해결을 국가의 책임을 약속했다. 희생자 배·보상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라며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희생자와 유족의 신고 상설화, 유적지 보존과 희생자 유해발굴 등도 약속했다.
1일 제주를 찾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도 “제가 집권하면 아직도 풀지 못한 나머지 4·3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다. 대통령 자격으로 추념식에 반드시 오겠다”고 말했다. 국민의 당 안철수 후보는 “4·3평화공원은 미래와 평화의 상징”이라며 “4·3희생자 배·보상을 적극 추진하겠다. 4·3특별법을 개정해 제주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희생자 및 유족들의 재활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1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국가가 진상규명을 하고 명예회복을 해 드릴 일이 있으면 하고 배·보상 문제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는 것이 당당하고 떳떳한 일”이라며 법적 근거 마련을 약속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제주4·3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며, 대통령의 공식사과도 있었던 만큼 피해를 본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배·보상을 해야 한다. 또 특별법을 개정해 배보상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공약했다.
이런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 대해 박찬식 제주학센터장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사이에 과거사 해법의 중요한 과제가 정의구현인데 후보들이 이 원칙에 공감하고 있다고 본다. 4·3해결이 제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주요 후보들이 4·3문제 해결에 전향적인 약속을 한 것과는 달리 로드맵 등 구체적인 실행계획은 밝히지 않아 원론적 입장에 그칠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허영선 제주4·3연구소 소장은 “희생자 배·보상을 적극 추진하는 것은 4·3의 국가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후보들의 4·3공약에 따른 로드맵 등은 보이지 않는다. 차기 정부가 들어서면 공약을 실행에 옮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희생자 배·보상의 경우 일부 연구자들은 1조8천억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제주도가 발표한 대선 공약과제에는 1조1300억여원으로 돼 있다. 한성훈 연세대 역사와공간연구소 연구교수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4·3정책토론회에서 대법원의 민간인 학살 판결에 근거해 1만5천여명의 희생자와 미망인, 희생자 자녀, 형제자매 등을 고려하면 1조8천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2004년 3월 제16대 국회가 보상금과 생활, 의료지원금 등 최대 2천억원의 예산이 들어갈 수 있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 법률안’을 심의·의결했지만, 정부는 국가 재정상의 어려움을 들어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또 실제 배·보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과제도 많다는 지적도 있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단 공약은 좋은데 후보들이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소요 재원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좋은 말이니까 모든 후보가 다 해결한다고 한 것 같다”며 “배·보상이 이뤄지기까지는 상당한 논란이 일 것이다. 4·3특별법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에 배·보상 규정을 넣어 가칭 배상치유기금 같은 큰 기구를 만들어서 접근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양윤경 제주4·3유족회장은 “후보들의 공약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명쾌하게 임기 중 문제 해결을 약속한 부분은 없어 아쉽다”며 “내년 4·3 70주년 때 모든 후보가 참석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내년에는 공약에 대한 로드맵 등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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