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이 지난해 3월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을 벌여온 강정마을 주민과 활동가 등에게 34억4800만원의 구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한 가운데 이번 대선을 앞두고 구상권 철회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가고 있다. 허호준 기자
“지난 10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2007년 이후 억울하고 괴로운 나날들이었는데, 이번에는 구상권이라는 커다란 암초에 우리 앞에 떨어졌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과거의 10년보다 앞으로의 10년이 더 힘들 것입니다.”
지난 1일 오후 마을주민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조경철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회장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주요 후보들이 내놓은 ‘구상권 철회’ 공약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조 회장은 “후보들의 공약을 기대하는 주민들이 많다. 가능한 한 빨리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고권일 마을회 부회장은 “후보들이 표를 위한 사탕발림으로 말해서는 안 되고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지 처리가 가능하다. 후보들이 사회를 통합하고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하기 때문에 구상권 철회를 위한 노력을 기대하고 있다. 지역 공동체 회복을 위해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집권 초기 강정마을의 갈등 봉합을 기대했다. 윤상효(80)씨도 “강정마을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구상권 철회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다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며 “차기 정부가 들어서면 달라질 것”이라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모두 제주4·3문제 해결을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강정마을 구상권 철회 문제에 대한 공약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강정 주민의 아픔과 갈등을 치유하고 도민사회의 통합을 위한 방안이 적극적으로 강구돼야 한다”며 “국책사업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아픔에 책임 있게 대처하겠다. 강정마을에 대한 해군의 구상금 청구소송은 철회하고 처벌 대상자는 사면하겠다. 강정마을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공약했다.
안철수 국민의 당 후보도 “정부의 구상권 소송은 갈등 해소와 주민 화합 차원에서 철회해야 한다. 마을 공동체 복원을 위해 국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도 구상권 철회 문제에 적극적이다. 유 후보는 “도민사회의 통합을 위해 해군의 구상금 청구소송 철회와 사법처리 대상자 사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 강정 주민의 아픔과 갈등을 치유하고 공동체 회복의 차질없는 추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지금까지 정부가 국책사업에 반대하는 주민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한 선례가 없고, 이런 행위는 국민의 기본권인 의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겠다는 것이므로 구상권을 철회해야 한다”며 추진과정의 문제에 대해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반대투쟁을 ‘집단적 불법행위’라고 규정하고 ‘무관용’ 입장을 천명했다. 홍 후보는 “지역주민 등 이해관계가 없는 종북 집단이 도민을 선동하고 있다. 국책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에 절대로 관용을 허용하지 않겠다. 집단적 불법행위에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은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한 지 만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강정마을은 마을의 모습도, 주민들도 변했다. 마을 내 언덕배기에 있던 감귤 과수원, 밭과 강정마을 해안의 넓은 구럼비 바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해군기지가 거대하게 들어섰다. 지난달에는 미군 구축함까지 기항했다. 아기자기하고 고즈넉했던 마을은 기지가 들어서면서 넓은 도로가 개설되고 군인 가족을 위한 연립주택 등도 건설되는 등 주변 환경이 달라졌다. 달라진 것은 그뿐만 아니다. 주민들은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방패를 든 경찰들이 수백명씩 마을에 진입하는 것을 보았고, 이에 맞서기도 했다. 주택가 곳곳에는 어느 날부터인가 ‘해군기지 반대’라는 노란 깃발이 걸렸고, 일부 가게에는 태극기가 내걸렸다. 삼촌 조카 사이이던 마을의 이웃사촌들은 갈등관계가 됐다. 연인원 700여명이 연행됐고, 사법처리 건수만 480여건에 이른다. 개인이 내거나 마을회가 부담한 벌금도 3억8천여만원이다. 해군기지는 강정마을을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주민들은 10년 동안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런 주민들에게 지난해 3월에는 또다시 날벼락이 떨어졌다. 해군이 주민과 활동가들 때문에 공사가 지연됐다며 개인 116명과 강정마을회 등 5개 단체에 34억4800만원의 구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대림산업과 삼성물산도 추가로 중재 신청을 하거나 요청을 하는 등 절차를 밟고 있어 2, 3차의 구상금 청구소송이 이어질 전망이다. 해군기지 찬·반으로 마을이 갈리고, 반대 주민들 간에도 구상금 청구소송 대상자와 비대상자가 있어 또 다른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구상금 청구소송 철회는 마을 갈등을 봉합하는 첫 단계로 평가된다. 강동균 전 마을회장은 “마을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싸워온 우리가 왜 구상금까지 물어야 하나. 대선 후보들이 강정의 아픔을 헤아려 이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주해군기지의 전력화 등 제주도 군사기지화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크다. <한겨레> 대선 자문단인 강호진 제주 주민자치연대 대표는 “국책사업에 반대했다고 해서 정부가 주민들에게 구상금을 청구한 사례가 없다. 후보들의 공약은 당연하고, 고마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아 해결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구상금 청구소송 철회만 언급했을 뿐 제주도의 군사기지화에 대한 언급은 없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