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지난 4월3일 4·3 희생자 유족들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지석을 찾았다. 제주/허호준 기자
제주 4·3(1947년 3월~1954년 9월) 당시 많은 제주도민들은 군경 또는 우익 청년단원들에게 붙잡히거나 피신생활을 하다 귀순하면 고문을 당하고 ‘재판 아닌 재판’을 받고 수감됐다. 당시 재판을 받았던 제주도민들 가운데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들은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 당시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재판을 받은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신의 죄명이나 형량을 몰랐다. 일반재판을 받은 이는 1320명, 민간인이면서도 군사재판을 받은 이는 2530명이다. 한국전쟁 이전에 형기를 마치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있지만, 전쟁 뒤 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학살됐다. 수형생활이 끝난 이들 가운데는 고향으로 못 오고 수십 년 동안 육지를 떠돈 이들도 있다. 70여년 동안 침묵 속에 살아온 이들, 4·3 수형인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 ‘4·3 수형인’은 누구인가 “나만 형량을 모른 게 아니라 같이 간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몰라. 한 열흘 정도 있다가 교도관들이 죄명과 형량을 묻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 ‘이런 놈들이 있느냐’고 해. 그때야 제주도 구미(조)는 징역 15년이란 걸 알았어.” 제주 4·3 당시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이 불타 산속에서 피신생활을 하다 붙잡힌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오영종(89·당시 20살)씨는 징역 15년형을 받고 7년6개월을 살았지만, 대구형무소에 간 다음에도 형량을 몰랐다.
1949년 1월13일 마을이 불타자 산(어승생오름 주변)으로 피신했다가 5월10일 재선거날 귀순한 제주시 오도롱마을 현우룡(95·당시 26살)씨는 “7월 초 재판소에 실려 가니까 호명을 하면서, ‘아무개 ○○죄’ 식으로 말하다가 ‘남은 사람은 가 있으면 서면으로 형기를 알리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오씨와 같은 형무소에 간 그는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인솔 경찰관이 몇 개월 살고 나올 사람들도 있고, 아무리 죄가 큰 사람도 1년 이상 가질 않는다고 해 아무러면 몇 개월이면 못 살겠느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도 형무소에 간 다음에야 징역 15년이란 걸 알았다.
징역 15년형을 받은 제주 사람들의 형기는 1952년 3월1일 이승만의 ‘특별감형’으로 7년6개월로 줄었다. 1948년 11월20일 소개령이 내려 마을이 불타자 제주시내 백부댁에 와 생활하다 같은 해 12월 초 우익청년단에 붙잡힌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출신 양일화(87·당시 18살)씨는 “취조실 안에 겨울철이라 드럼통에 구멍
을 뚫어 장작을 넣어서 연료를 땠는데 그 장작으로 정신없이 맞아 몸뚱이가 붓고 운신을 하지 못했다”며 그 뒤 재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높은 군인이 ‘아무개’ 하고 이름을 불러 일어서면 ‘너 뭐 했지?’ 하고 묻고 ‘네’ 하면 앉았다. 하루에 수백명이 재판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양씨는 1월 초 인천형무소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인솔자 3명이 300여명의 형량을 부르고 갔다고 했다. 양씨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 ‘4·3 수형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48년 10월 하순께부터 1949년 2월까지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 때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탔다. 특히 1948년 11·12월에는 하루 평균 60~70명에 이르는 제주도민들이 매일 죽어갔다.
1948년 12월20일,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가 불에 타고, 주민들은 토벌대에 학살되기 시작했다. 양근방(85·당시 18살)씨는 “새벽에 형제들이 밥을 해먹고 있으니까 토벌대가 들이닥쳐 총을 쏘아 대부분 죽었다. 둘째 형님과 사촌형, 오촌형 등 그 자리에서 희생자가 7~8명이 나왔다”고 말했다. 양씨는 “나는 다리에 총을 맞았고, 형은 세 군데 맞아 피가 하늘로 솟았다. 군인들은 19살 난 작은형수를 끌고 가 ‘폭도들이 숨은 데를 가르쳐주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모른다’고 하자 대흘국민학교에서 죽여버렸다”고 말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 캄캄한 밤, 양씨는 큰형과 함께 형수의 주검을 집으로 옮겼다. “그 시체를 큰형과 함께 들것을 만들어 와산까지 끌고 올 때 그 심정, 형제들이 총 맞아 죽어갈 때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양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형과 형수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피생활을 하던 양씨는 이듬해 4월 함덕으로 귀순했으나 “형들이 사상이 불순했기 때문에 너도 빨갱이”라며 제주시 주정공장으로 끌려갔다. 양씨는 7월5일 재판을 받았다. “재판할 때 이름도 부르지 않았어. 그냥 재판정에 갔다 온 것밖에 없어. ‘너는 폭도다’, ‘너는 내란죄다’ 이런 얘기만 들었어.” 그는 인천형무소에 간 뒤 징역 7년이란 걸 알았다. 그가 제주를 떠날 때 다른 배에 탔던 큰형은 대구형무소로 간 뒤 행방불명됐다. 1년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형무소 문이 열렸고 출소한 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광주에서 노동하다 1956년 붙잡혀 재수감됐다가 잔여 형기 1년6개월을 남기고 석방됐다.
이보다 한달여 전인 11월 중순, 서귀포시 서홍동 오계춘(95·당시 26살)씨는 남편이 행방불명되자 생후 10개월 된 아들을 업고 토벌대를 피해 낮에는 산에 숨었다가 밤에는 민가를 찾아 하루하루 살다 길가에서 토벌 갔다 오던 경찰에 붙잡혔다. 오씨는 “뭣 허래 댕겸시니 허멍 무조건 차에 오르랜만 헙디다. 아기 업은 양 올라수다”(뭐 하러 나다니냐며 무조건 차에 오르라고 합디다. 아기 업은 채로 올랐어요)라고 했다. 오씨는 서귀포경찰서로 갔다가 제주경찰서로 넘어가 한 달 남짓 유치장 생활을 했다.
“경찰서에 사람들이 직각허난 애길 안앙 발 벋얼집니까. 영 오그령 애길 이 우에 안앙 밤낮 한달을 살아수게. 애기가 굶으난 울 생각도 없고, 배고팡 죽어갈 거 아니우꽈.”(유치장에 사람들이 가득 차니 아기를 안고 발을 뻗어집니까. 이렇게 오므리고 아기를 위에 안고 한달을 살았어요. 아기가 굶으니 울 생각도 하지 않고 배고파 죽어갈 거 아닙니까.)
12월 초순 오씨는 재판을 받고 배에 올랐다. 오씨는 “‘아무개 ○년’, ‘아무개 ○년’ 하면서 호명하다가 ‘나머지 1년’ 했다. 이름을 부르지 않자 1년인가 했다”고 말했다. 배에 오르자 아기는 굶어 죽었다. “한달은 살앙 어둑해갈 때 배에 오르랜 허난 애기가 배에서 죽읍디다. 인솔 경찰에 ‘애기 죽은 거 어떵헙니까’ 하니, ‘업엉 내립서’ 해.” 생후 10개월 된 죽은 아기를 업은 오씨는 목포에 도착했다. “인솔해간 경찰안티 ‘이젠 어떵헐거우꽈’ 하니 ‘경찰서 무뚱이에 부립서. 부리민 묻어줍니다’ 해.”(경찰한테 ‘이젠 어떡합니까’라고 하자 ‘경찰서 마당에 내려요. 내리면 묻어줍니다’라고 해.) 오씨는 그곳에 아기를 남겨두고 전주형무소로 가야 했다. “가슴이 벌러질 거 아니우꽈. 형무소만 차라리 며칠 전에 오라시민 쌀 몇방울 먹어봥 죽어시민 두루 억울허주만은 번찍 굶어죽은 생각 허난 한 몇년 동안 말 고를 생각도 엇고, 웃을 생각도 엇고, 가슴이 벌러지게 아픕디다.”(가슴이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며칠 전에 왔으면 쌀 몇 방울 먹고 나서 죽었으면 덜 억울하지만 앞에서 굶어 죽은 생각 하니 몇년 동안 말할 생각도 없고, 웃을 생각도 없고, 가슴이 끊어지게 아픕디다.) 70년 전을 회상하는 오씨의 회한은 깊고 깊었다.
1948년 11월7일 토벌대에 의해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가 불에 타자 가족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했던 오영종씨는 “아랫마을에는 토벌대가 주둔해 내려갈 수 없어 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개월 뒤인 1949년 1월7일 부모와 동생 둘은 2연대 군인에게 붙잡혔고, 잡혀간 당일 아버지는 동네 주민 3명과 함께 총살됐다. ‘도꼬리낭’(찔레꽃) 새순이 돋던 4월 중순께 마을 인근 거린오름 뒤 냇가에서 토벌대를 만나 도망치다 총상을 당해 붙잡혔다. 총상을 입고 같이 붙잡힌 동네 주민의 등에 업혀 주둔소로 내려온 그는 군인으로부터 “이런 놈을 죽여버리지 데려왔냐”는 말을 들으며 장작으로 마구 구타당했다. 그는 7월 초 재판을 받으러 갔지만, “재판을 받은 기억은 없다”고 했다. “동료의 등에 업혀서 갔고, 신원을 확인한 게 전부였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오씨는 대구형무소로 갔다. 300명이 한배에 탔으나 한명이 죽어 299명이 같이 갔다. 7년6개월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고향에서는 그가 살았는지조차 몰랐다. 그는 “석방돼서 고향에 오니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니 주변 사람들이 놀랐다”고 했다.
제주시 화북2동 거로마을의 제주농업중학교 5학년생 부원휴(89)씨는 1948년 12월4일 집에 있다가 가택수색을 하는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부씨는 “당시 계엄령이 내려진 시기였는데 군인 2명이 한 조가 돼 집집이 수색했다. ‘물어볼 게 있다’며 무조건 나오라고 해서 마을 쉼터에 세워진 군용 스리쿼터(4분의 3톤짜리 트럭)에 탔다. 이미 잡혀 온 주민 2명도 있었다. 그길로 농업학교 천막 수용소로 향했다. 수용소로 끌려간 부씨는 심하게 고문받았다.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은 취조할 때 거꾸로 매달아 놓고 기절하면 물을 지치고(끼얹고), 양쪽 엄지손가락에 전기를 꽂아 돌려요. 그러면 거의 죽어요.” 토벌대는 부씨에게 ‘산에 연락하지 않았느냐’, ‘삐라(유인물) 뿌리지 않았느냐’고 추궁했고, 부씨는 ‘학생인데 내가 뭘 하느냐’고 답변했다. 조서가 어떻게 작성됐는지도 모른 채 1948년 12월12일 재판소로 갔다. “법원에 데려가더니 이름만 호명해. 너희들은 내란을 일으킨 놈들이라고.” 며칠 뒤 포승줄에 묶인 채 배에 탔고, 목포를 거쳐 인천형무소에 갔다. 그곳에서 인솔자가 호명하면서 형량을 알게 됐다. 부씨는 금고 1년형을 선고받고 1949년 10월15일 석방됐다.
■ 재심을 청구한 까닭은? 지난 4월19일 80대 후반에서 90대 중반의 노인 13명이 제주지방법원 앞에 섰다. 평균나이 89.5살. 이날 몸이 불편해 나오지 못한 5명을 더하면 모두 18명. 아흔이 다 된 노인들이 법원에 간 것은 ‘4·3 당시 군법회의 재심 청구서’를 내기 위해서다. 이들은 제주 4·3 당시 아무런 죄도 없이 형무소 생활을 한 것이 억울하다며 재심을 신청했다. 이번 재심 청구소송을 낸 당사자들은 모두 군사재판을 받았던 이들이다.
금고 5년형을 받았던 현창용(85·제주시 광평마을)씨는 “징역 산 게 너무 억울해서 냈다. 지금도 내가 왜 잡혀갔는지 모르겠다.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그때 나를 왜 잡아갔는지 묻고 싶다. 16살이었는데 농사를 짓다가 집에 누워 있는 사람을 새벽 1시께 경찰이 들이닥쳐 구둣발로 차면서 일어나라고 해서 잡아갔다”며 “그 이후 인생이 완전히 뒤틀렸다”고 말했다. 현우룡씨는 “산에서 피신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7년6개월을 징역 살고, 자식들이 (연좌제에) 발이 묶여서 어디 가지 못하고,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명예회복을 시켜달라는 것뿐, 다른 목적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계춘씨의 아들 강은호(60)씨는 “아들이 국가기관에 최종 합격했는데 어느 날 떨어졌다는 통지를 받았다.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재심 청구 신청을 위해 서류를 떼어보니 ‘내란죄’로 기록됐다. 당시 어머니가 데모했다가 벌 받았으면 억울하지 않겠다. 아기를 업고 도망가던 어머니였는데…”라고 말했다. 오영종씨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요시찰인으로 지목돼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자주 조사를 받았다. 오씨는 “혼자서라도 재심을 청구하려고 하다 여의치 않아 그만뒀다가 이번에 참여했다. 한이 맺힌 걸 풀고 싶다”고 했다.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주변 곶자왈에서 피신생활을 하다 1949년 4월께 토벌대에 붙잡힌 박동수(87·당시 19살)씨는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명예회복의 문제다. 재심 청구하려고 경찰에 가서 기록을 떼어보니 징역 7년형이란 게 남아 있었다. 나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잡아다 재판 없이 형무소 보내고, 이런 억울함이 어디 있느냐”고 하소연했다.
“형제들이 다 죽어가는 걸 보며 나만 살아났어. 살면서 그 원한이란… 죄를 지어 징역을 살았으면 억울이라도 않지, 아무 죄도 지어본 적 없는데 총을 세 번이나 맞고 5년 넘게 형무소 산 게 억울해 신청했어.” 양근방씨의 말끝은 떨렸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명예회복’이다. 이들의 소원은 살아생전 이뤄질까.
제주/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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