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용 전 3공수여단 11대대 소령, 지휘권 이원화 가능성 시사
군 정식 지휘 계통과 달리 보안사-특전사-공수부대 라인 ‘의혹’
5·18 당시 제3공수특전여단 11대대 지역대장이었던 신순용(69) 전 소령이 지난 13일 전북 진안의 한 마을에서 지휘권 이원화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80년 5·18 당시 공수특전여단 부대가 별도의 무전 체계를 사용했다는 지휘관 증언이 나와 주목된다. 이는 공수부대가 군 공식 지휘체계가 아니라 보안사령부와 특전사령부로 이어지는 별도 지휘체계에 따라 움직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5·18 당시 제3공수특전여단 11대대 지역대장이었던 신순용(69) 전 소령은 지난 13일 전북 진안의 한 마을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31사단과 공수부대가 쓰는 무전기 채널이 달랐다”고 증언했다. 당시 제3, 7, 11공수여단에서 사용한 무전기는 P-7, U-87 2종류가 있었는데, P-77이 대대 작전용 무전기였다. U-87은 대대나 여단본부나 (특전)사령부와 직접 교신하는 데 사용하는 무전기였다고 한다. 신 전 소령은 “공수부대만 따로 무전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수부대만 주파수 채널이 따로 있었다”고 밝혔다.
이 증언은 국방부 과거사위원회(2006년)에 7여단 무전병 ㅁ씨가 증언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ㅁ씨는 지난 2006년 3월 국방부 과거사 조사관에게 “U-87 무전기로 하루 세차례(오전 10시, 오후 5시, 밤 10시) 시간을 정해 놓고 무전기를 개방해 음어를 주고 받았고, 부사수인 나는 음어를 풀었다”며 “이 것은 오로지 사령부 교신에만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31사 혹은 다른 보병부대와 전혀 무선 교신을 한 기억이 없다면 실질적으로 공수부대가 31사 작전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며 “이는 지휘권 이원화 문제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신 전 소령 등의 증언은 5·18 당시 육군본부-2군사령부-전투교육사령부-31사단-공수여단이라는 정식지휘계통과 달리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을 통해 지휘가 이뤄졌을 의혹과 맞물려 있다. 5·18발포 명령자를 찾으려면 국방부 장관과 계엄사령관, 2군 사령관을 거치는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가 아니라 별도 지휘체계가 존재했는지 여부부터 밝혀야 한다. 5·18연구자들은 “무전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증언은 군을 장악하고 있던 신군부 실세들이 통상의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규명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수부대가 따로 작전 지휘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증언도 나왔다. 신 전 소령은 ‘3공수도 31사 작전 통제하에 있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가네들 통제받는 것 아니고, 별도로 한 거지요. 31사단이 통제했으면 총 쏘라고 했겄어요?”라고 반문했다. 실제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5월 20일 밤 10시30분 제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여발을 배분한 것을 시작으로 12·15대대에 실탄을 체계적으로 지급했다. 광주역 충돌과정에서 시민 4명이 희생됐다. 2군사령부에서 밤 11시20분 ‘발포 금지, 실탄 통제 지시’가 있었지만 묵살됐다.
5월21일 국방부 회의는 5월20일 밤 발포 사망 사건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신 전 소령은 “(5월20일) 밤 9시 전후해 (옛 전남도청 인근이) 불바다가 돼 사망자가 발생했다”며 “총알도 떨어져 (11공수부대가) 조선대로 철수했고, 우리 부대도 밤 11~12시께 광주역으로 철수한 뒤 실탄을 받았다”고 밝혔다. 신군부가 쓴 ‘12·12 및 5·17 승리의 기록’인 <제5공화국전사>를 보면, 5월21일 국방부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군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는 자리에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도 참석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21일 저녁7시30분 방송을 통해 자위권 보유 사실을 알렸다.
진안/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