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기지엔 용산이 없습니다. 또 용산기지에 몽골군이나 왜군이 주둔했다는 속설도 사실이 아닙니다.”
20일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을 펴낸 서울 용산문화원 김천수 역사문화연구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작인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에 이어 이 책은 현재 용산기지 일대의 역사를 깊고 세밀하게 다뤘다. 용산기지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아는 사실들도 바로잡았다.
용산기지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이 기지가 용산 일대에 있거나 이 기지 안에 용산이 있다는 인식이다. 이 책은 용산기지가 ‘용산’이 아니라 ‘둔지미’(둔지산) 일대에 있었다는 점을 첫머리에 밝혔다. 조선 때 이 지역의 공식 지명도 ‘둔지미’에서 이름을 딴 ‘둔지방’이었다. 둔지미는 ‘둔전 부근의 산’이나 ‘작은 산이나 언덕’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둔지미라는 지명은 전국에서 나타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부대전청사가 있는 대전 둔산동이다. 둔산동의 옛 이름도 둔지미였다.
용산은 이 둔지방의 서쪽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만리재와 효창공원, 용산성당 일대의 긴 산줄기를 말한다. 이 기지의 이름이 용산이 된 것은 러-일 전쟁 이후 일본군이 이 땅을 차지하면서부터다. 일본군은 둔지미 일대를 ‘신용산’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신’자가 빠지면서 이 일대가 ‘용산’으로 둔갑한 것이다.
또 이 책은 고려 때 몽골군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용산기지 일대에 머물렀다는 속설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고려 때 몽골군이 이 일대에 머물렀다는 역사 기록은 전혀 없으며,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기 때문에 몽골군이 이 곳에 와서 주둔할 이유는 없었다. 또 임진왜란 때도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원효로 일대에,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갈월동 부근에 주둔했다. 다시 말해 왜군은 진짜 ‘용산’ 부근에 주둔했고, 용산기지(둔지미) 쪽에는 주둔하지 않았다.
용산기지에 외국 군대가 처음 주둔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다. 당시 청 군대는 ‘둔지미’에 주둔하던 청 군영을 방문한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톈진으로 보냈다. 그리고 러-일 전쟁 뒤 일본군은 이 일대의 땅 118만평을 강제수용해 주둔군 사령부로 사용했다. 1945년엔 미군이 이 기지에 들어왔고 오늘에 이르렀다.
김천수 실장은 “미군이 평택으로 가면서 환수되는 용산기지의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땅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된 용산공원도 조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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