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유신정권 말기 물가 폭등과 빈부 격차,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원인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는 불쏘시개 구실을 했던 부마민주항쟁 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위수령 관련 절차를 어기고 불법적으로 공수부대 등 군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지기 직전인 79년 10월 중순 부산, 마산 등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시위를 말한다.
20일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위원회)가 발표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16일 부산에서 발생한 시위가 경남 마산시로 확산하자 10월18일 박찬긍 부산지역 계엄사령관에게 “마산지역 소요 사태를 파악해서 재량에 따라 필요한 조처를 하고 공수특전여단 1개 대대를 마산으로 이동시켜 39사단장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박 계엄사령관은 19일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 공수부대 1개 여단을 마산에 보냈다.
마산으로 군 병력을 보내려면 위수령이 먼저 내려져야 한다. 광역시장과 도지사의 군 병력 출동 요청이 있으면 위수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해서 승인을 받거나 긴급할 때는 즉시 군 병력을 투입하고 사후에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런데 부마민주항쟁 당시 김성주 경남도지사의 군 병력 출동 요청이 없었다. 위수령이 발동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박 전 대통령은 10월18일 박 계엄사령관에게 마산으로 군 병력을 이동시켜라고 지시했다.
1979년 10월 부산마산민주항쟁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자 부산시청(부산 중구 중앙동) 앞에 탱크들이 배치됐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또 당시 조옥식 마산지역 위수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의 사전 승인과 사후 보고도 하지 않고 10월18일 오후 6시 병력을 마산시내에 처음 출동시켰다. 이어 밤 10시30분부터 39사단 병력과 전차 3대 등을 출동시켜 시위대를 마구 진압했다.
위수령 절차 문제가 일자 조 위수사령관이 10월 20일 낮 12시를 기해 마산시 일대에 병력 출동을 명령했다는 서류가 뒤늦게 작성됐다. 중앙정부에서 위수령에 따라 출동 명령을 내리고 이후에 경남도지사가 군 병력 투입을 요청한 것처럼 처리했다는 것이다.
부산에 내려진 비상계엄도 절차를 무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상계엄은 국무회의에서 결정하는데 당시 임시국무회의는 17일 밤 11시30분께 열려 18일 0시20분께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를 의결했다. 하지만 군 병력은 17일 밤 11시께부터 부산에 투입됐다.
보고서는 “박 전 대통령이 경남도지사의 병력 요청이 없었는데도 공수부대를 마산으로 이동시키라고 한 것과 조 마산지역 위수사령관의 병력 투입, 국무회의의 비상계엄 결정 전 부산에 군 병력 투입은 절차를 무시한 불법행위다”고 판단했다.
부산/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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