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1일(양력 9월10일) 갑자기 동남풍이 크게 불어 비까지 퍼붓는 바람에 기왓장이 날아가고 돌이 구르고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뽑혔습니다. 오래된 관아 건물은 기울어져 무너지고 낡은 민가들은 떠내려갔으며, 곡식도 온통 결딴이 나서 온 섬이 허허벌판이 돼 버렸습니다. .… 이런 혹심한 재해를 당하여 수많은 주민이 굶어 죽어 시체가 고랑을 메우는 탄식을 면치 못할 것 같아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조선 고종 때 제주목사 양현수는 1865년 9월 고종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목사는 초가을 태풍으로 황무지가 된 제주에서 수만 명이 굶어 죽어 시체가 고랑을 메울 정도라고 탄식했다.
김오진(57) 제주시 세화고 교감이 펴낸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푸른길)에는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일어난 각종 기후 재해와 도민들이 굶주린 실상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기후재해는 기근과 전염병 확산, 사망률 급증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내내 재해가 끊이지 않았지만, 제주도 3대 기근으로 불리는 경임대기근(1670~1672년), 계정대기근(1713~1717년), 임을대기근(1792~1794년)은 재앙의 수준을 넘어섰다. 계정과 임을대기근 땐 각각 제주 인구의 30%와 23%가 떼죽음을 당했다. 경임 때 <현종실록>(1671년 4월3일)에는 당시 상황이 묘사돼 있다. 목사 노정이 현종에게 보낸 전문에는 “제주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260여명이나 되고 남은 자도 이미 귀신 꼴이 되었다. .… 사람끼리 잡아먹을 순간이 닥쳤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김 교감은 이번 작업을 위해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과 제주도에 왔던 목사와 어사, 유배인 등이 남긴 개인 사료들을 활용했다. 그가 분석한 15~19세기 제주도 이상기후를 보면, 인간과 동식물에 피해를 준 이상기후 건수는 모두 107건이다. 도는 이런 기후변화에 대응해 돌담을 쌓고 방풍림을 만들었다. 가뭄에는 소나 말이 밭을 밟도록 하는 밧볼림을, 폭우는 가로밭갈기 등으로 대응했다. 방사탑 설치나 영등제 등의 민간신앙도 재해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난사고도 많았다. 제주 기점 왕래자들의 해난 사고는 모두 152건으로, 18세기에 58건으로 가장 많았고, 17세기가 14건으로 가장 적었다. 그는 17세기가 제주도에서 이상기후가 가장 빈번했지만, 중앙정부가 제주인들의 도외 출륙과 해상활동을 통제해 해난사고가 적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제주인들이 표류했던 일본 오키나와 중국, 베트남 호이안도 답사했다.
세종이 농업이나 구휼제도 개선보다는 계속되는 기근과 식량 부족, 국영목장 경영을 이유로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제주인들을 평안도 등지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대목도 관심을 끈다. 성군으로 불리지만 제주도민에겐 가혹한 군왕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게 기후다. 선인들이 어떻게 기후를 인식했고 대응하면서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특히 제주도는 해수면 상승 등 기후변화가 직접 감지되는 곳이어서 제주로 좁혀 연구했다”고 말했다. “제주인의 문화와 정체성은 혹독한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죠. 기후재해를 극복한 제주 선인들의 생명력과 정신력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