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한학 공부의 결실로 고산 윤선도의 동시를 번역한 임귀남씨.
“고산의 한시를 완역하는 데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직계 9대 손부인 임귀남(62)씨는 21일 고산이 지은 동시(東詩) 29수를 번역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그는 “17세기를 대표했던 깊고 높은 정신세계를 일부나마 엿볼 수 있었다. 번역 내내 진흙 속에 묻혀 있던 보물을 찾아내 깨끗이 닦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시조 ‘어부사시사’로 문학사에 한획을 그은 고산은 한시 작품 600여수를 남겼고, 이 가운데 200여수가 동시다. 동시는 조선의 과거 시험 때 주어진 제목에 따라 즉석에서 지어 제출했던 7언 한시를 이른다. 한자 일곱자씩 18운 36구 이상인 장편시로 역사 명구 경전 전기 전설 등을 등장인물이 대신 말하는 방식으로 쓰여진다. 제목에 운자를 갖고 있는 등 한국에만 있는 특유한 시형이다.
그는 32살 때인 1988년 광주향교에서 우연히 <사자소학>을 접하면서 한학에 입문했다. 이후 30년 동안 <사서삼경> <고문진보> <자치통감> 등 고전을 두루 읽으며 천착했다. 2년 전에는 체계적인 한학 공부를 위해 전남대 대학원 한문고전번역협동과정에 등록했다.
논문을 준비하던 그는 몇해 전 해남 녹우당의 전적조사 때 나온 고산의 <동시 필사본>에 흥미를 느꼈다. 해남윤씨 가문으로 시집온 만큼 400년 전 선조가 어떤 문장을 남겼는지 궁금했다. 전문가한테도 버거워 여태껏 9수밖에 번역하지 못한 영역에 도전해 보고 싶은 열망도 일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한 번역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글자는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초서여서 판독이 까다롭고, 내용은 고금의 역사와 인물을 넘나들어 배경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서예와 한문, 중국어에 두루 밝아야 했어요. 서예는 젊은 시절 취미였고, 중국어는 자료를 검색하고 성조를 익히려고 따로 익혀야 했지요. 이렇게 다진 지식을 모두 동원해 초서를 풀고 주석을 달고 뜻풀이를 하는 과정은 온전한 기쁨이었지요. ”
그는 동시 한 수를 번역하는 데 한 달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을 열정적으로 밀고 갔다. 일부는 지도교수들한테 5차례 감수를 받으며 오역을 바로 잡고, 주석을 고쳐 썼다. 이런 노력 끝에 그는 24일 논문 ‘고산 윤선도 동시 선역’으로 전남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고산의 한시 중 절반은 아직 번역이 안 됐다. 이 중 동시 200수를 모두 번역해 문학사적 가치를 높이는 데 필생을 바치겠다. 어렵고 외로운 길이지만 끝까지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