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청계천 공구특화거리의 모습. 사진 김미향 기자
“볼트, 너트, 스프링 만드는 이웃 공구상과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데, 주변 공구상 거리가 재개발되면서 다 떠나고 있어요.”
8일 서울 세운상가에서 만난 이동엽 아나츠 대표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조립식 스리디(3D) 프린터를 출시한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다. 서울시가 4차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키운다며 2017년 5월 세운상가에 설치한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 그는 같은 해 9월 입주했다. 이 대표가 입주를 결정한 것은 세운상가 인근에 금속가공 제조업 생태계가 발달해 실력 있는 토박이 장인들과 수시로 협업할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구상 거리의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단골 공구상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는 “협력업체 10여곳이 문을 닫았다.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허탈해했다.
2017년 9월 세운상가 재생 사업인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부분 공사를 마무리 지을 당시 서울 중구 청계천로 세운상가.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을 나와 청계천을 따라 걸으면 수표교부터 관수교 일대까지 공구상 530여곳이 모여있다. 이곳에 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그 뒤 1961년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어씌운 뒤 공구상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번창했다. 하지만 최근엔 유통환경의 변화로 예전의 활력은 잃은 상태다. 중구청은 이곳을 ‘공구특화거리’로 지정해 문화해설사와 함께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한국의 산업화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유람 코스 등 관광상품을 내놓기도 했다.
세운상가 3층 아나츠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이동엽 대표. 사진 아나츠 제공
활력을 잃어가는 거리에 직격탄을 날린 것은 최근 속도가 붙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 3-4·5구역의 철거 작업이다. 철거에 따라 이곳에서 영업하던 업체 400여곳은 다른 곳으로 점포를 옮기거나 폐업해야 한다. 공구상이 떠난 자리엔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곳은 지난 연말 서울시 발표에 따라 주거비율이 90%까지 높아지는 도심 재개발 사업의 첫번째 적용지역이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달 말 도심 상업지역의 주거용도 비율을 현행 50%(세운재정비촉진지구 60%)에서 90%로 확대해 공공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3일 청계천 공구특화거리의 모습. 사진 김미향 기자
상인들은 이 일대 재개발 사업에 대해 “대규모 주상복합을 짓기 위해 제조업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에 국내 제조업 기반을 형성해온 금속가공 제조업 생태계가 붕괴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이동엽 대표는 “재개발로 구로구 지(G)밸리, 문래동 공장지대 등으로 이주한 상인도 있지만, 상당수는 새 가게에 이주할 자금이 부족해 일을 접었다. 3대째 내려온 공구 장인들이 문을 닫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운상가 상인, 도시계획 연구자, 예술가 등 60여명은 지난 2일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를 꾸려 “청계천 을지로의 진정한 재생”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이들은 “세운상가 인근 지역의 재개발을 당장 중단하고, 제대로 된 도시재생을 위해 이 지역을 제조산업문화특구로 지정하라”고 서울시와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8일 청계천3가 사거리 관수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데 이어, 오는 10일에는 이런 요구안을 서울시와 국토교통부에 보낼 예정이다.
공구특화거리를 관광상품으로 내놓았던 중구청도 난감한 상황이다. 중구청 관계자는 “이 지역 재개발이 빨리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특화거리를 지정해 ‘을지유람’이란 동네투어를 운영해왔다. 재개발 사업 탓에 을지유람 코스를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