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민주항쟁 이후 빠르게 확산됐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진 국공립대 총장 직선제가 잇따라 부활하고 있다. 직선제를 되살린 대학에선 막혔던 언로가 트이며 학내 소통이 활발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직선 총장들이 연대해 정부에 ‘지방대 살리기’를 촉구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1979년 유신정권 몰락 이후 자유화 국면을 일컫는 ‘서울의 봄’에 빗대 ‘대학의 봄’이 오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12일 <한겨레>가 전국 국공립대 총장협의회에 가입한 4년제 대학 41곳을 모두 조사해보니, 24곳(58.5%)에서 직선으로 총장을 선출했거나 선출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장 직선제는 정규직 교수 전체 또는 교직원·학생 대표까지 참여하는 직접 투표로 총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전북대·충북대·광주교대·전주교대 등 16곳이 이미 총장을 직선으로 선출했고, 경북대·서울교대·충남대 등 8곳은 직선 총장 선출을 준비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인 2017년 5월 당시 총장 직선제를 유지한 국공립대가 부산대와 서울시립대 2곳뿐이던 사실에 견주면 가파른 증가세다.
순천대 교수와 교직원들이 지난달 18일 9대 총장임용후보자 보궐선거에서 투표하고 있다.순천대 제공
최근 직선으로 총장을 뽑은 대표적 대학은 전남의 순천대다. 지난달 18일 교수·직원·학생 등의 직접 투표로 고영진 식물학과 교수를 1순위 후보자로 선출한 뒤 교육부와 청와대의 임명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순천대는 직선제로 총장을 뽑다 2015년 6월 교수 대표 등 48명이 참여하는 간선제로 전환한 바 있다. 4년 만에 직선제를 부활시킨 전북대도 지난해 10월 선거에서 1순위로 뽑힌 김동원 산업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가 지난 1월부터 4년 임기의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압력에도 직선제를 유지했던 부산대는 2015년 11월 선출된 전호환 총장이 4년째 임기를 이어가고 있다. 대통령이 총장을 임명하는 4년제 국공립대 가운데 1987년 이후 간선으로 총장을 선출하지 않은 곳은 부산대가 유일하다. 서울시립대도 직선제를 유지해왔지만 대통령이 아닌 서울시장이 임명권자다. 이 대학은 지난해 12월 선거에서 1순위로 뽑힌 서순탁 도시행정학과 교수가 지난 1일 임명장을 받고 임기를 시작했다.
부산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굴하지 않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전국 4년제 국공립대학 총장 가운데 유일하게 직선제를 고수했다. 직선으로 선출된 전호환 교수가 2016년 6월 취임식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부산대 제공
직선제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직선 투표를 거쳐 지난해 8월 김수갑 총장이 취임한 충북대는 학내 구성원들이 총장에게 직접 정책제안을 하는 정책플랫폼 ‘충북대 1번지’와 각종 건의사항을 올리는 ‘열린 신문고’를 운영하면서 구성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충북대 관계자는 “임명제나 간선제 총장에게 없던 힘과 권위가 실리면서 학교 운영의 신뢰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려는 직선 총장의 시도에 호응과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민주적 선출 제도가 단과대학 단위까지 확산되는 것도 뚜렷한 흐름이다. 군산대는 2017년 8월 간선이던 총장 선출 방식을 8년 만에 직선제로 복귀시킨 뒤 단과대 학장도 직선 투표로 뽑거나 선호도 조사를 통해 1순위자를 임명하고 있다. 이런 제도는 총장 직선제를 지켜온 부산대가 앞서 시행한 모델이다. 김성환 군산대 교수평의회장은 “직선으로 총장을 뽑으니 리더십이 강해지는 측면이 있다. 교수뿐만 아니라 학생, 조교, 직원까지 총장 선출에 참여하게 되면서 학내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소통을 강조하며 직선 총장으로 뽑힌 김수갑 충북대 총장(가운데 안경쓴 이)이 지난해 9월 12일 충북대 학생회관 별빛식당에서 학생 등과 점심을 함께 하며 취업·학교 운영 등을 토론하고 있다.충북대 제공
직선으로 뽑힌 총장들은 한목소리로 정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하기도 한다. 지난 7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국 국공립대 총장협의회는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을 위한 대학 지원사업 구조 개선 등을 교육부에 강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김석수 부산대 기획실장은 “협의회에 참여하는 직선 총장 비율이 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정책 건의에 과거보다 힘이 실리는 분위기”라며 “소신 발언을 하기 힘든 간선 총장들과 달리 직선 총장들은 정부 눈치를 그만큼 덜 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직선제 전환을 결정하는 대학도 꾸준히 늘고 있다. 경상대 교수회는 지난달 26일 정기총회를 열어 11대 총장을 내년 3월 이전에 직선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올해 총장 선거가 진행될 서울교대와 서울과학기술대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전환해 총장을 뽑는다. 김영철 전 국공립대교수회연합회 상임회장은 “이전 정부의 강압으로 간선제로 전환한 대학들로선 문재인 정부가 직선제를 허용한 마당에 직선제 복귀를 미룰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총장 직선제 전환을 새로 의결한 대학은 12일 현재 경상대와 서울교대 등 8곳에 이른다.
전호환 부산대 총장은 “말 잘 듣는 인사를 공공기관장에 임명하는 과거 정부의 관행에서 국공립대 총장 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폐해를 절감한 대학들이 자율성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총장 직선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국공립대 총장 간선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대학 길들이기’ 정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명박 정부는 ‘국립대 선진화’를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재정지원 사업과 연계해 총장 직선제를 반강제로 폐지했다. 박근혜 정부는 간선으로 선출된 1순위 후보자조차 임명을 미루는 방식으로 국공립대 총장 선출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총장 직선제 역시 폐해가 만만찮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직교수 임명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진 총장직을 두고 교수 사회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해야 할 국공립대 교수들이 파벌을 지어 갈등하고 반목하는 양상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직선제로 전환해 총장 선거를 치른 전북대에서는 선거운동 기간 특정 후보자에 대한 경찰 내사설이 유포되는가 하면, 선거법 위반 여부를 둘러싸고 상호 비방과 성명전, 고소고발이 난무했다. 이 과정에서 정책 이슈는 실종되고 선거판은 네거티브 공방으로 얼룩졌다. 올해 11월 직선제로 전환해 총장을 뽑는 충남대 관계자는 “총장 후보끼리 경쟁이 본격화하면 편가르기에 따른 후유증이 우려된다. 원하던 직선제를 얻었으니 분열과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일 부산롯데호텔에서 전국 국공립대학교 총장협의회가 총회를 열고 있다. H6s부경대 제공
일각에선 교수들에게 절대적 비중의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는 “총장 직선제는 대학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위한 보루인 만큼 지켜나가야 할 제도지만 과연 구성원 전체의 진정한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인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박남기 한국교원교육학회 회장도 “투표권의 80% 이상을 교수가 차지하다 보니 교수들 사이에서 파벌이 생기는 등 폐해도 심각하다. 대학 구성원에 교수만 있는 것이 아닌 만큼 학생과 교직원 등의 참여 비율을 높이는 등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광수 김미향 정대하 박임근 최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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