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 총영사관 근처 정발 장군 동상 앞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철거한 부산시를 규탄하고 있다.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23년 만에 지방정권이 교체된 뒤 시민단체들과 소통을 강조해온 부산시가 ‘강제징용 노동자상’ 철거 문제로 시민단체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적폐청산·사회대개혁 부산운동본부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특별위원회’(건립특위)는 14일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 총영사관 근처 정발 장군 동상 앞에서 ‘강제징용 노동자상 기습철거 규탄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시민단체들이 부산시가 도로 관리를 위임한 동구청과 일본 총영사관 앞이 아닌 곳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부산시가 기습적으로 노동자상을 철거한 것은 부산시의 역사관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건립특위는 “일본군 성노예(종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등 과거 역사에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대신해 노동자상을 철거한 것과 다름없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 총영사관 근처 정발 장군 동상 옆에 세워졌던 강제징용 노동자상. 김영동 기자
애초 건립특위는 지난해 5월1일과 지난달 1일 일본 총영사관 출입문 근처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바로 옆에 노동자상을 설치하려 했으나, 중앙정부와 부산시가 반대하자 지난달 1일 평화의 소녀상에서 150여m 거리의 정발 장군 동상 근처에 임시로 설치했다. 동구와 건립특위는 지난 11일 협상을 통해 임시로 설치한 곳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노동자상을 두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부산시는 “이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12일 저녁 6시15분께 노동자상을 철거해 부산 남구 대연동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1층으로 옮겼다. 건립특위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의 노동자상을 정발 장군 동상 근처로 다시 가져오겠다고 밝혀 건립특위와 부산시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예상된다.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총영사관 근처 정발장군 동상 옆에 세워졌던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지난 12일 철거되고 강제노동을 상징하는 자갈 등만 남았다.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부산시의 노동자상 강제 철거는 지난해 7월 오거돈 시장이 취임한 뒤 첫 행정대집행이다. 부산의 시민단체들은 취임 뒤 오 시장이 ‘시민과의 소통’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는 점에서 부산시의 이번 결정에 실망하고 있다. 그동안 오 시장은 온라인에서 부산 시민 3000명이 공감하면 직접 답변하는 청원 제도를 도입하고, 찬반 논란이 뜨거웠던 간선급행버스(BRT)의 지속 추진 문제도 공론화위원회에서 다루는 등 ‘소통 행정’을 펼쳐왔다.
그래서 이번 결정은 부산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 관계를 지나치게 의식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 집권 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종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을 두고 한-일 관계는 냉각돼왔다. 그러나 부산시 관계자는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은 행위를 바로잡은 것”이라고만 밝혔다.
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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