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가 펴낸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린 북한산성 행궁의 옛 모습.
도시와 생활 - 일제∼한국전쟁 거치며 소멸 13개 성문등 옛모습 찾을듯
수없이 북한산을 오르내리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북한산성 행궁(경기도기념물 160호)’이 복원될 전망이라는 소식을 듣고 ‘행궁’을 찾아 나섰다. 행궁이란 왕이 임시 숙소나 전시 피난처로 이용하는 작은 궁을 뜻한다. 북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 화성 행궁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행궁으로 꼽힌다고 한다.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과 함께 27일 오전 10시께 북한산성 매표소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10℃까지 떨어진 기온 때문에 장갑과 모자를 꼈는데도 금세 손가락과 귀의 감각이 무뎌졌다. 빙판이나 다름없는 등산로를 따라 조심조심 대서문과 식당들이 밀집한 북한동 마을, 중성문을 지나자 곧 노적봉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태고사를 지나 대성암 방향으로 약 400m를 더 올라가자 ‘북한산성 행궁지’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정동일 위원은 “처음에 이곳이 행궁지인 줄 알고 표지판을 잘못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등산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300여m를 오르자 행궁이 있던 터가 나타났다. 등반을 시작한 지 1시간30여분 만이다.
현재 행궁지에는 건물터와 축대, 담장, 기와조각 등만 남아 있다.
산 중턱에 자리한 3천여평 넓이의 평평한 땅 한가운데 서니 북쪽으로 장수가 군사들을 지휘하던 ‘동장대’가 멀리 보였다. 정 위원은 “이곳이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12개의 사찰,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이뤄진 북한산성의 한가운데”라고 말했다.
행궁은 조선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을 돌성으로 고쳐 쌓을 때 지어졌다. 내전과 외전을 모두 합쳐 124칸 규모였고, 고문헌 등이 비밀리에 보관됐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행궁의 원래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발밑에는 돌을 깎아만든 축대와 평평한 건물터 등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행궁지 경계에는 돌로 쌓은 담장이 남아 있었고, 곳곳에 기와조각이 널려 있었다. 1904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가 펴낸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린 행궁의 옛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구한말까지 계속 관리가 됐으나, 행궁은 일제시대부터 방치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정 위원은 “1915년 8월 큰 비에 행궁 일부가 쓸려 내려갔고, 일제시대에 항일의병들이 이 곳을 기지로 이용하면서 훼손이 계속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행궁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경기도, 고양시는 최근 행궁을 복원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문화재청은 “최근 현장조사를 벌인 결과 훼손이 심각해 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며 “우선 행궁지에 대해 시굴·발굴조사를 벌인 뒤 중장기적으로 복원방안을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산을 내려와 북한동 마을에서 정 위원과 함께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정 위원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을 오르내리면서도 북한산 곳곳에 숨어있는 소중한 문화재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행궁이 복원되면 북한산이 등산의 명소일 뿐만 아니라 문화재의 보고로서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 겁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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