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은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부산·인천도 항구다. 미국 뉴욕이나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도 항구다. 그러면 서울은? 40년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에는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나룻배, 짐배, 고깃배가 숱하게 다녔다. 100년 전에는 마포~인천, 용산~강화 사이에 기선이 정기적으로 운항했다.
좀더 거슬러 고려와 조선시대 한강은 오늘날의 고속도로였다. 내륙의 한강 물길을 통해서 강원·충청·경상도, 서해와 한강 하구를 통해 전라·충청·황해·평안도의 세곡과 화물이 각각 개경과 한양으로 옮겨졌다. 당시 경강(광나루에서 양화나루에 이르는 한강)의 내륙 항구와 포구는 30여개나 형성됐다. 또 서해와 한강의 물길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만나고 부딪쳤다.
오늘날의 한강은 물길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개발 시대에 한강은 서울의 발전에 중대한 걸림돌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강남 개발은 한강을 서울의 남쪽 변두리에서 서울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이제 동북아 시대에 한강은 서울의 무한한 가능성이며, 한국이 세계와 만나는 관문이 될 수 있다.
2. 배를 타고 평양까지
지난 11월9일 서울 이촌나루터에 묶여있던 ‘거북선’이 한강 하구 비무장지대와 서해를 거쳐 통영으로 갔다. 이번 일은 단지 거북선이 제 자리를 찾은 것뿐 아니라, 분단으로 막힌 한강의 물길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제껏 한강 물은 서해로 흐르고 서해의 갈매기는 한강으로 날아들지만, 한강의 배는 서해로 나아가지 못하고, 물고기들은 김포 신곡 수중보를 넘지 못했다.
개성공단의 건설은 남북 화해와 경제적 효과 외에도 서부 전선 일대 군사대립의 체감온도를 한껏 낮추었다. 한강 하구의 비무장지대에서 남북의 배들이 자유롭게 뒤섞인다면 누가 누구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한강 하구가 베를린 콘크리트 장벽처럼 남북의 단절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육지에서 경의선과 금강산 도로로 남북을 잇듯, 서울과 평양이 한강과 서해, 대동강을 통해 만나게 하자.
3. 버스배로 출퇴근
이스탄불은 바다의 도시다. 사람들은 배를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바다, 골든 혼을 넘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 옛 시가지에서 새 시가지로 자유롭게 옮겨다닌다. 베네치아는 운하의 도시다. 사람들은 버스배, 택시배,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이곳 저곳, 베네치아와 리도 섬 사이를 오간다. 이스탄불과 베네치아에서 배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서울은 강의 도시다. 서울에서도 배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타고다닐 수 없을까? 이미 서울시는 유람선 외에 택시배를 도입해 운행 중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상습 정체가 일어나는 여의도~강남·잠실 사이에 버스배 운행을 제안하기도 했다. 일산에서 여의도나 마포로 택시배를 타고 출근하면 어떨까? 여의도에서 일을 마치고 강남이나 잠실로 버스배로 퇴근하면 또 어떨까? 출퇴근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한강에 버스배·택시배가 시원하게 떠다닌다.
4. 헤엄치고 모래찜질
쨍쨍 햇볕이 따가운 여름, 당신은 어디로 휴가를 떠날 것인가? 맑고 푸른 바다와 모래밭, 산이 둘러친 동해로 갈까? 아니면 너른 모래밭과 진흙 마사지로 유명한 서해로 갈 것인가? 아니면 방에서 뒹구는 ‘방콕’?
파리시는 지난 2002년부터 센강 주변 6㎞의 콘크리트 둔치에 인공 모래밭과 야자수 숲을 조성해 여름에 바다로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는 파리 시민들의 마음을 달래고 있다. 서울시도 최근 이를 흉내 내 한강 둔치 일부에 인공 모래밭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서울 시민들은 ‘인공 모래밭’이 아니라 여의도·밤섬, 동부이촌동, 뚝섬, 광나루 앞 한강의 천연 백사장에서 여름 휴가를 즐겼다. 답답한 콘크리트 둔치와 수중보를 걷어내자. 그러면 북적이는 동해·서해로 떠나지 않고도, 널찍한 한강에서 헤엄치고 뱃놀이하며 모래찜질 할 수 있다. 겨울엔 꽁꽁 얼어붙은 한강에서 스케이트·썰매도 지치고 걸어서 건너도 보자.
5. 올림픽·강변대로 건너자.
예전에 서울 아이들은 이렇게 한강에 갔다. 먼저 너비가 좁은 강북 강변도로를 휙 건너고, 강둑을 훌쩍 뛰어넘은 뒤, 발바닥이 데일 것 같은 백사장을 부리나케 달려서 속옷도 홀라당 벗고 한강에 풍덩! 서울내기들이 더이상 한강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된 것은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성과(?)였다.
1960년대엔 한강가에 새로 강둑을 돋우면서 옛 강둑과의 사이를 메워 아파트를 지었다. 1980년대엔 한강가의 남북에 8차로의 강변도로를 닦아서 사람의 접근을 막았고, 백사장은 콘크리트 둔치 속으로, 차오른 강물 속으로 파묻혀버렸다.
현재처럼 굴길·육교로 한강가로 나아가는 것은 이제 더이상은 싫다. 강변·올림픽 대로에 지붕을 덮어씌워 사람들이 그 위로 걸어다니게 하자. 8차로 강변·올림픽 도로를 좁히고 건널목을 놓아 한강에 더 쉽게 다가가게 하자. 그래서 예전에 한강가로 뛰어갔던 그 맨발의 아이들의 아들딸들도 다시 한강가로 달려가게 하자.
6. 갈대숲과 버들의 속삭임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민요 <노들강변>을 김영임의 구성진 목청으로 들어보자.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 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흘러 가노라…” 근데, 그 시절 노들나루(노량진) 아낙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강가의 수양버들·능수버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마른 바람소리를 내며 흔들리던 충남 서천 금강가의 갈대숲이 왜 서울 한강가엔 없는 걸까?
한때는 그보다 더한 갈대숲이 한강가를 가득 메운 채 서로 몸을 비비며 서 있었다. 한강가에서 갈대숲의 버석거리는 소릴 듣고 싶고, 강둑에 휘청대는 버들을 보고 싶다면 한강의 콘크리트 둔치와 수중보를 걷어내라. 백사장과 습지가 다시 숨을 쉬면 한강가에도 흐드러진 갈대숲과 풀어헤친 버들이 머리를 들 것이다. 그런 한강가 갈대숲 속, 버들 가에서 수많은 사랑과 추억이 피고 또 지리라.
7. 그 섬에 가고 싶다.
강 가운데 섬의 운명은 물의 변덕스런 흐름에 달려 있다. 강의 한쪽에 물이 세차게 굽이쳐 흐르면 반대편엔 깎이고 밀린 흙모래가 쌓인다. 그렇게 쌓인 모래는 삼각주가 되기도 하고, 모래섬이 되기도 하다가 큰물이 지면 삐죽한 돌봉우리만 빼곤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한강에서도 잠실섬과 부리도, 저자도, 뚝섬, 노들섬, 여의도, 밤섬, 난지도, 선유도가 그렇게 자라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오늘 잠실섬과 뚝섬, 여의도, 난지도는 사실상 육지가 됐고, 노들섬과 선유도, 밤섬은 상처입고 살아 남았다. 저자도는 자취도 없어졌다. 끝내 살아남은 노들섬, 선유도, 밤섬에 가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보자. 섬으로 태어났다가 육지에 삼켜진 잠실섬과 뚝섬, 여의도, 난지도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보자. 뚝섬가에 서서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진 저자도의 외로움을 느껴보자. 오페라 하우스에 짓눌릴 노들섬의 공포를 생각해보자.
8. 다리 위에서 축제를
한강의 다리를 걸어서 건너보았는가? 걸어서 건너보면 왜 평소에 걷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 알 수 있다. 한강다리에 오르기는 힘들고, 다리 위의 인도는 좁고 길며, 바로 옆에선 차들이 무섭도록 쌩쌩 달린다. 한강 다리에 오르면 걸어서 건너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난다. 그러나 일제 때 한강에 두번째로 놓인 다리의 이름은 ‘한강 인도교’(한강대교)였다. 당시엔 명물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건넜다.
한강에 사람들만 건너고 머무는 다리를 놓아 보자. 건축가 김석철은 이미 10년 전에 사람·차량을 위한 2층 다리와 건물, 나루터가 복합된 다리를 놓자고 제안했다. 용산공원과 국립현충원 사이에 숲이 우거진 생태다리를 놓고, 노들섬, 선유도에 보행자 다리를 연결해보자. 다리 위에 쇼핑 거리와 카페, 광장, 공연장을 지으면 어떤가? 그런 다리에서 한강 축제를 벌이고 다이빙 대회를 열어도 즐겁지 않겠는가?
김규원 기자
ch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