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이었다가 명승으로 변경된 `원지’ 담양 소쇄원. 김규원 기자
역사적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난 서울 성북구 성락원과 같은 ‘별서·정원’(법률상 ‘원지’)이 사적과 명승으로 두번이나 지정된 데는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사적-명승의 혼란스러운 분류가 원인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가 ‘원지’를 ‘사적’뿐만 아니라 ‘명승’으로도 지정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을 해방 뒤 문화재보호법이 그대로 이어받았고, 2007년부터는 이를 더욱 혼란스럽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1일 <한겨레> 기자가 취재해보니, 현행 문화재보호법과 문화재청의 기준은 별서·정원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할 때 역사·문화 유산인 ‘사적’뿐 아니라 자연 유산인 ‘명승’으로도 지정할 수 있게 돼 있다. 과거에도 별서·정원은 사적과 명승으로 모두 지정할 수 있었으나, 문화재청은 ‘사적’으로만 지정해왔다. 그러나 2007년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을 개정하면서 사적 중 일부를 명승으로 지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2008년 담양 소쇄원, 남원 광한루원, 완도 보길도 윤선도 유적,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유적, 서울 성북동 성락원 등 ‘별서·정원’들은 한꺼번에 역사·문화 유산인 ‘사적’에서 자연 유산인 ‘명승’으로 재지정됐다.
이렇게 역사·문화 유산이 분명한 별서·정원들을 자연 유산인 명승으로 지정하는 이유는 1933년 일제가 제정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하 조선보물보존령)을 문화재보호법이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조선보물보존령은 별서·정원을 말하는 ‘원지’를 ‘고적’(사적)과 ‘명승’ 항목에 모두 포함해 혼란의 씨앗을 뿌렸다. 해방 뒤 일제의 이 보존령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문화재보호법도 2007년 시행규칙 개정 때까지 ‘원지’를 사적과 명승 항목에 모두 포함했다.
사적이었다가 사적으로 유지된 `원지’ 경주 계림. 김규원 기자
관련 시행규칙이 2007년 개정됐으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문화재청이 ‘원지’(정원과 연못)를 명승 항목에서 완전히 빼지 않고 원지와 똑같은 개념인 ‘정원·원림·연못’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명승 항목에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7년 문화재위원회는 새로운 기준을 세워 12곳의 ‘원지’를 재분류했다. 경주 계림 등 7곳은 사적으로 유지했고, 담양 소쇄원 등 5곳은 명승으로 변경했다. 원지 가운데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은 사적으로, 자연 경관의 가치가 큰 것은 명승으로 한다는 자의적인 기준이었다. 당시 조경학회 쪽이 경주 계림 등 7개 원지도 명승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사적과 명승의에 대해 문화재청도 비교적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다. 2009년 문화재청은 ‘사적 및 명승’이란 중복된 문화재 지정을 해제·재지정하면서 역사·문화 유산은 사적으로, 자연 유산은 명승으로 나눴다. 예를 들어 ‘사적 및 명승’이었던 법주사와 해인사,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 대흥사 등을 건물이 있는 절 내부(역사·문화 유산)는 사적으로, 숲이 있는 절 외부는 명승(자연 유산)으로 재지정한 것이다.
이런 문화재청 기준에 따르면, 2007년 명승으로 재분류된 담양 소쇄원 등 5곳은 사적으로 유지하는 게 타당했다. 그러나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이나 서울 성북동 성락원은 사적으로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백석동천은 2007년까지 재분류 당시까지 조성자·소유자 등 역사적 근거를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9년 역사적 근거가 대부분 엉터리로 드러난 성락원은 당연히 사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사적이었다가 명승으로 변경된 `원지’ 성락원은 역사적 근거가 대부분 엉터리로 드러났다. 문화재청 제공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이 사실상 같은 개념인 ‘원지’(정원·연못)와 ‘정원·원림·연못’을 각각 사적과 명승 항목에 모두 둠으로써 이런 혼란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역사·문화 유산은 사적으로, 자연 유산은 명승으로 명확하게 구분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혼란이다. 일제의 잘못된 분류법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땅따먹기하듯 문화재의 종류를 쪼갠 결과”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박한규 문화재보존국장은 “문화재보호법이 일제로부터 나온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동안 우리 방식으로 발전시켜왔다. 또 ‘원지’를 사적과 명승으로 구분하는 데 큰 혼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흔적이 강한 터는 사적으로, 경관이 좋고 정원에 가까운 것은 명승으로 지정했다”고 해명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