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하게 걷기 딱 좋네요. 경치도 좋고, 날씨도 좋고, 사람도 많지 않아 너무 좋네요. 코로나 때문에 답답해 산책 삼아 들렀는데 대통령급 호사를 누리네요.”
지난 25일 찾은 충북 청주시 청남대. 아이들 손을 잡은 젊은 부부와 연인 등이 널찍이 떨어져 걷던 도중, 대전에서 왔다는 한 관광객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문을 닫았던 청남대는 지난 22일 부분 개장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하루 평균 2천여명이 찾는 국민 휴양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 한산함 속에서 호젓한 청남대의 매력은 더욱 빛을 내는 듯했다.
대통령 별장으로 쓰이다가 국민 품으로 돌아온 한적한 휴양지인 청남대가 최근 사람들 입길에 오르고 있다. 청남대 안에 설치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동상과 기념물 철거 논란 때문이다. 과연 동상은 철거될 수 있을까? 또 철거하는 게 맞을까?
청남대 오각정 앞에 설치된 전두환 전 대통령 동상.
지난 5월13일 충북지역 시민사회단체 10여곳이 꾸린 충북 5·18민중항쟁기념사업회는 충북도를 찾아 청남대 안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과 기록화 등 기념물 철거를 촉구했다. 이들은 “군사반란을 일으킨 역사적 죄인인 전·노씨를 미화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동상·기념물 등을 7월 안에 철거하라”고 밝혔다. 이에 충북도는 도정 자문위원회를 거쳐 동상 철거를 결정했다. 시민단체는 환영했고, 7월 안 철거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충북도의회에서도 동상 등 철거 근거를 담은 조례안이 6월 발의됐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금고 이상 형이 확정되면 기념사업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기념사업을 중단·철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조례안은 7월과 9월 회기에서 상임위 상정이 거푸 미뤄졌고, 도의회는 다음달 토론회·여론조사 등을 거쳐 조례를 제정할지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임영은 충북도의회 행정문화위원장은 “다음달 14일 의회에서 동상 철거 찬반 단체, 충북도, 도의회, 학계 등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열 계획이다. 찬반양론이 팽팽해 토론회 뒤 여론조사를 거쳐 결과를 보고 조례안을 처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토론과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서는 동상 철거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결정을 두고서는 도의회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충북도의원 31명 가운데 25명(80%)이 공동 발의한 조례이기 때문이다. 대표 발의자인 이상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부분 의원이 함께 발의한 조례안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는 것은 의회와 의원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앞으로 모든 조례를 여론조사로 만들어야 하는 선례가 될 수도 있다”며 “상임위가 보수 여론을 의식해 제 일을 하지 않으면 사보임을 통해 행정문화위원회로 옮겨 조례안 처리를 주도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상 철거가 이처럼 표류하게 된 데에는 보수성향 단체들의 반대가 영향을 미쳤다. 충북자유민주시민연합은 지난 7월 충북도 앞에서 동상 철거와 관련한 조례 제정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 단체 이재수 대표는 “전·노 대통령 동상은 정치적 고려 없이 관광을 위해 만든 관광상품이다. 정치적 판단 때문에 철거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충북5·18민중항쟁기념사업회 등이 지난 14일 충북도청 앞에서 청남대 안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 등 기념물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
이에 동상 철거를 주장하던 쪽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와 5·18기념재단, 충북 5·18민중항쟁기념사업회, 대전충청 5·18유공자회 등은 지난 14일 ‘5·18학살주범 전두환·노태우 청남대 동상철거 국민행동’(국민행동)을 꾸렸다. 정지성 국민행동 집행위원장은 “충북도가 범법자 전·노씨의 동상 철거를 미적거려 전국 5·18 관련 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연대했다. 10월 말까지 철거하지 않으면 충북도와 이시종 충북지사 규탄 행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국민행동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동상 철거 청원글을 올리고, 범국민 서명에도 나섰다.
보수성향 충북자유민주시민연합이 지난 7월 충북도청 앞에서 청남대 안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 철거에 반대하고 있다.
봉황정에서 본 청남대 본관. 가운데 군청색 지붕이 청남대 본관이다. 사방 숲, 물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청남대가 난데없는 전직 대통령 동상 문제로 수난을 겪는 배경에는 ‘대통령의 휴양지’라는 역사적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청남대의 역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시작된다. 1980년 12월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한 전씨가 “저런 곳에 휴양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하자, 장세동 경호실장 등이 움직였다고 한다. 1983년 6월18일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27일 준공식을 했다. 처음엔 ‘영춘재’로 불렀지만, 1986년 ‘남쪽의 청와대’란 뜻을 담은 청남대로 개명했다.
청주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변에 자리 잡은 청남대는 “어떻게 이런 곳이 여기에”란 말이 나올 정도로 천혜의 요새다. 물은 산이 막고, 산은 물이 막아 사방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1급 보안 지역이었으며, 지금도 사방 곳곳에 철조망과 초소 등이 남아 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현암사에서 청남대 쪽을 가리키며 “천년 뒤 물이 차고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듯 국토의 중심이요, 국왕이 머물 자리”라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청남대는 전체 부지는 335필지 182만5647㎡(충북 129만2053㎡, 대전 53만3594㎡)에 이르고, 건물은 본관동 등 52동이 있다. 반송·금송·낙우송 등 124종 11만6천 그루의 조경수, 143종 35만포기 들꽃, 멧돼지·너구리 등이 뛰노는 야생 동식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청주 상당구 문의면 주민들이 청남대를 개방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담아 쌓은 돌탑.
청남대는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이 89차례 찾아 366박 472일을 머물렀다. 청남대 조성 때부터 지금까지 청남대를 지키고 있는 김찬중(55)씨는 “전·노 대통령은 골프를 좋아했다. 골프가 있는 날엔 근무하던 군인들이 식사 때 산으로 돌아 식당에 가는 등 조용히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조깅, 김대중 대통령은 산책을 즐겼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전거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4월17일 청남대에 들러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청남대를 국민에게 개방했다. 이날 아침식사 뒤 자전거를 타고 청남대를 둘러본 노 전 대통령은 개방식에서 “이렇게 좋은 줄 미리 알았다면 개방 안했을 겁니다”라고 특유의 농담을 던졌고, 주민 등 800여명은 박수와 웃음으로 청남대를 받았다. 청남대가 자리하는 청원군 문의면 32개 마을 이장단과 주민 5800여명은 노 대통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돌 5800개로 쌓은 탑을 선물했다. 노 대통령은 떠났지만 마을 주민의 마음은 탑과 함께 남아 있다.
청남대 관리권을 넘겨받은 충북도는 대통령의 추억에 역사를 덧대 청남대를 국민 휴양지로 탈바꿈시켰다. 개방 이후 지난해 말까지 청남대엔 1245만2693명이 다녀갔다. 하루 평균 2414명이 찾은 셈. 올핸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지난 23일까지 13만9598명에 그쳤다. 김낙영 청남대 관리사업소 운영과장은 “코로나 탓에 관람객이 예년의 3분의1도 안된다. 하지만 조용히 사색하며 마음과 몸을 쉬게 하는 관광객이 꾸준하게 찾는다”고 말했다.
청남대는 역대 대통령들이 즐겨 찾았던 곳을 중심으로 대통령 테마길을 조성했고, 곧 명소가 됐다. 논란이 된 동상들은 테마길 들머리에 있다.
전두환 대통령 길(1.5㎞·30분)은 본관에서 출발해 오각정을 지나 양어장까지 대청호변에 조성됐다. 그에 이어지는 평탄하게 이어지는 수변 산책로가 노태우 대통령 길(2㎞·40분)이다. 육사 동기이자 전·후임 대통령이었던 두 사람 관계처럼 길도 연결돼 있다. 김영삼 대통령 길(1㎞·30분)은 김 전 대통령이 평소 조깅하던 코스에 조성됐다. 김대중 대통령 길(2.5㎞·60분)은 645계단을 오르고, 출렁다리 고비를 만나는 등 산책이라기보다 등산에 가까울 정도로 험난하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역정과 닮았다. 노무현 대통령 길(1㎞·20분)은 두 김 대통령 사이 산속에 조성돼 있어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다.
2013년 1월 개장한 이명박 대통령 길(3.1㎞·90분)은 가장 긴 코스다. 청남대는 애초 박근혜 대통령 길을 염두에 두고 산책로를 조성했지만 단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은 데다 탄핵당해 물러나면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리더십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글·사진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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