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새벽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상인들이 산지에서 올라온 김장용 무를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마디로 가락시장은 ‘양파’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경매하는 데예요. 자주 가서 경매사들하고 안면을 트면 값을 어느 정도 쳐주지만 어쩌다 한번 가는 출하자는 당합니다. 값을 후려쳐 버려요.”(김천중 전국양파생산자협회 전남지부장)
농민·소비자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공영 도매시장이 대형 도매시장법인의 안정적인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감사원이 최근 서울시의 시장도매인제 도입을 막는 농림축산식품부 감사에 나서기로 하면서 도매시장법인들이 36년 이상 독과점적 지위를 누려온 구조가 바뀔지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작성한 ‘농수산물 도매시장 거래제도 개선방안’에는 “농수산물 가격 불안의 원인은 도매시장법인들이 독점하고 있는 경매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와 있다.
■ 춤추는 도매가격…농민은 가격 결정에서 배제 현 농산물 유통구조와 관련한 문제점으로는 ‘품질과 무관한’ 갑작스러운 가격 급등락이 첫손에 꼽힌다.
지난해 9월3일 가락시장 양배추(8㎏) 경매가는 7020원이었지만, 다음날 1만6251원으로 131%나 급등했다가 이튿날 8723원으로 46%나 폭락했다. 같은 해 2월26일 3만8326원이었던 백다다기오이(100개) 경매가는 이튿날 6만4413원으로 치솟았다가 하루 만에 4만186원으로 주저앉았다.
문제는 이렇게 가락시장에서 정해진 가격이 전국 모든 농수산물 도매시장 가격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이니세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유통본부장은 “소비자들은 가락시장 도매가격이 품질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물량으로 결정된다. 그날 들어온 농산물 가운데 상위 1∼5%는 특상품이 되고, 6∼35%는 상품, 그 이하는 중품이 된다. 예를 들어 사과라고 하면 당도나 과실의 크기를 봐야 할 것으로 기대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물량이 조금만 늘거나 줄어도 가격이 요동친다. 농부가 열심히 농사지어서 ‘특상’이라고 가져갔지만 물량이 많으면 ‘중’이 되고, 적으면 ‘중’이 ‘특상’으로 둔갑한다. 복불복이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을 ‘특상’으로 판 농부가 돈 벌 일은 없다고 한다. 품질이 ‘중’만 있는 날에도 경매에서 ‘특상’은 나오지만, 이날 ‘특상’ 값은 특상 값이 아닌 전날 ‘중’ 값 정도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와 사전에 계약해 직거래한 농부들도 이날은 이 가격에 준해 대금을 받는다. 이 본부장은 “자식처럼 키워 ‘특상’을 만들었지만 값에는 반영 안 된다. 출하자는 애초에 가격 결정에 관여하지 못하는 깜깜이 출하 방식이 현행 경매제다”라고 말했다.
■ 같은 날 내놓은 같은 물건도 가격은 천차만별 가락시장은 사실 ‘지붕’만 하나일 뿐 동화청과, 중앙청과, 한국청과 등 6개 도매시장법인이 독립적으로 경매를 진행하는 6개의 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 때문에 같은 날에 같은 출하자가 내놓은 농산물도 각 도매시장법인에 따라 값이 큰 차이가 나기도 한다. 농민들이 가락시장 경매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 2월28일 김아무개씨의 시금치(4㎏, 특1등급)는 저녁 7시 ㄱ 경매사(중앙청과)가 진행한 경매에선 6500원에 낙찰됐지만, 15분 뒤 ㄴ 경매사(동화청과) 경매에선 29% 낮은 4600원밖에 못 받았다. 올해 4월2일 오아무개씨의 알배기 배추(8㎏, 특1등급)도 저녁 6시44분 ㄷ 경매사(중앙청과) 경매에선 1만600원을 받았지만, 5분 뒤 다른 경매사(한국청과) 경매에선 26% 비싼 1만4400원으로 값이 매겨졌다.
이무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1985년 경매제를 도입할 때 취지가 소농들이 도매상인들과 가격을 협상할 때 힘이 약하니, 경매제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지금은 소농들이 납품하면 도매시장법인이 가격을 후려치는 제도로 변질됐다”며 “농민들로서는 다시 되가져오면 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냥 팔아만 주세요’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9년 가락시장 경매에서 응찰시간이 3초 이하인 비중.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제공
■ 경매 열건 중 세건은 3초 만에 끝나 불투명한 경매 과정도 농민들의 불만이 쌓이는 부분이다. 법원, 한국자산관리공사 등과 달리 ‘블라인드(암막) 경매’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이 이어지자 공사는 지난해 11월 경매인이 응찰자 정보를 볼 수 없게 경매방식을 바꾸도록 명령했다. “도매시장법인과 대형 중도매인(중간 도매상인)들이 짬짜미한다고 의심받기 때문”이라는 게 근거였다. 하지만 농협을 제외한 5개 도매시장법인들은 이에 반발해 서울행정법원에서 ‘이행명령 등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해 법적 다툼이 이어지는 중이다. 전국 공영시장 도매시장법인이 자신들의 이익 보호를 위해 만든 ㈔한국농수산물도매시장법인협회 관계자는 “경매사는 농산물 경매의 특성상 중도매인의 거래 성향을 잘 알아야 한다. 중도매인이 저가 응찰을 남발하는 걸 막고 농민들에게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취지”라고 말했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2019년 25개 주요 청과물 경매를 분석한 결과, 응찰 시간이 3초 이하인 비중이 59.2%로 나타났다. 한 사람만 응찰하는 단독입찰 비중은 3.8%였는데, 이 가운데 상위 5개 중도매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60.7%에 이르렀다. 경쟁 입찰의 의미가 무색한 것이다. 백혜숙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전문위원은 “많은 사람이 응찰해 경쟁하고 그렇게 해서 가격이 올라가는 게 경매제 취지인데, 실정은 응찰자를 미리 정해놓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라고 지적했다.
경매에 가격 제한 폭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우연히 반입 물량이 늘어도, 농산물 값은 생산원가 밑으로 뚝 떨어져버린다. 실제 지난해 대파 1㎏이 100원에 낙찰된 일도 있었다. 전남 진도에서 대파 농사를 짓는 농민 곽길성씨는 “농민들도 무조건 생산비를 다 반영해달라거나 농산물 비싸게 팔아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내가 키운 농산물이 잘 받든 못 받든 올바른 평가를 받게 해달라는 것”이라며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주식시장에서도 등락 폭을 정해 (과도한 급등락을) 막고 있는데, 농산물은 아무리 오르고 떨어져도 손도 못 쓰는 걸 어떻게 이해하겠느냐”고 말했다.
■ 영업이익률 20% 오가는 도매법인들 비합리적인 경매 구조 속에서 도매법인들은 높은 이익을 거둔다.
가락시장 6개 도매시장법인 가운데 농협을 제외한 5개 민간 법인들의 최근 3년간 평균 영업이익률은 2018년 18.8%(60억6200만원)→2019년 15.8%(43억6300만원)→지난해 23.9%(70억9400만원)에 이른다(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자료). 같은 기간 농가 평균 농업소득이 1292만원→1026만원→1182만원 수준에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서울청과의 모기업은 고려제강이고, 중앙청과는 태평양개발, 동화청과는 신라교역, 한국청과는 더코리아홀딩스, 대아청과는 호반건설 등이다. 모기업은 농업과 무관하다. 또 경매를 통한 이익금의 상당 부분은 매년 배당 형태로 모기업에 흘러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감사원 감사를 계기로 비합리적인 경매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두 건국대 교수(국제통상학)는 “현재 가락시장은 법의 보호를 받는 대기업들(도매시장법인)이 수탁을 독점해 막대한 수익을 챙겨가는 시장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이니세 본부장은 “특정 대기업 도매시장법인들만 이익을 보고, 출하자는 주권이 없고 소비자는 그냥 ‘봉’인, 모두가 희생되도록 하는 구조를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며 “지금도 정성껏 키운 수박이 온도 관리가 전혀 안 되는 주차장에서 12시간 이상 경매를 기다린다. 성수기에는 이틀은 기본이다. 소비자한테 가기도 전에 선도가 떨어져버리는 비효율적인 경매제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이무진 전농 정책위원장은 “서울시 등에서 공영도매시장 운영에 관한 토론회를 열면 도매시장법인 쪽 분들이 나오는데, 믿는 구석이 있는지 굉장히 고압적”이라며 “‘시장도매인제 도입은 농식품부에서 결정할 사안인데 서울시에서 조례를 만들지를 왜 얘기를 하느냐’는 식으로 쉽게 말한다”고 아쉬워했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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