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대동여지도’(경조오부). 인왕산에서 시작돼 한강까지 이어진 용산. 하지만 러일전쟁 뒤 일본군은 둔지산 지역을 멋대로 용산기지라고 불렀고, 뒤이어 주둔한 미국군이 그 이름을 승계했다. 100여년 만에 용산기지가 담장을 허물고, 용산공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하지만 지난 1월 확정된 그 이름이 다시 용산이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제가 터 잡은 이래 백년 넘도록 외국군 주둔지로 활용돼온 서울 용산 미군기지가 생태·역사공원으로 탈바꿈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방위사업청 터를 포함하도록 해 공원부지를 50만㎡ 이상 늘려 전체 터는 1153만2702㎡(348만9천평)에 이른다. 국민참여단이 꾸려져 공원 정체성, 주변 지역과 연계 등과 관련한 논의가 진행 중이고, 올해 1월에는 시민 공모로 공원 이름을 용산공원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가 부럽지 않은 공원 탄생을 앞두고, ‘용산공원에는 용산이 없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왜 이런 논란이 이는 것일까.
“안산~애오개~만리재~용마루고개 잇는 능선이 용산”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의 지하철 5·6호선 공덕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용마루고개 쪽으로 오르다가 고개 능선에서 한강변 쪽으로 우회전해 천주교 용산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은 주변 아파트들만 없다면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있었다.
용산성당이 들어선 한강변 해발 70~80m 높이 봉우리는 엄연히 이름이 있는 산이었다. 바로 ‘용산’이다. 동행한 김천수 용산문화원 연구실장은 “1921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지형도’를 통해 용산의 정상(해발고도 76.7m)을 최근 확인했다. 넓게 보면 용산은 안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지만, 좁게는 바로 이 정상을 중심으로 만리재·용마루고개 일대를 수백년 전부터 ‘용산’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남산 남쪽 너른 구릉지대를 통칭하는 용산이, 한강로 서쪽 마포와 경계선상에 위치한 야트막한 봉우리 이름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배우리 전 한국땅이름학회장의 설명이다.
“용산은 한강가에 솟은 산 이름으로 마치 용이 물을 마시는 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려 때 이색·이인로 같은 문인들도 용산의 경치를 시로 읊었습니다. 지금 부르는 ‘용산’이라는 이름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한강로 일대를 정비해 자기들 주거지로 삼고, 근처에 기차역·다리(한강대교)·큰길을 만들면서 ‘새 용산’이란 뜻의 ‘신용산’이라 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문상명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용산기지’라는 이름은 역사적으로 잘못된 명칭”이라며 “용산은 인왕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로 인왕산의 외백호”라고 말했다. 인왕산에서 안산(무악)을 거쳐 대현~애오개~만리재고개~용마루고개~용산성당으로 길게 뻗어 한강변에까지 닿아 있는 능선을, 선조들은 용이 한강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이해했다는 설명이다. 한강 물을 들이켜는 용의 입 앞으로 현재는 강변북로가 지나고 있다.
용산기지의 용산은 드래곤힐 아니라 둔지방·둔지미
그렇다면, ‘용산’이란 이름을 빼앗아간 현재 용산기지가 있는 지역의 옛 이름은 뭘까. 옛 문헌에는 ‘둔지미 마을’, ‘둔지방’이란 이름으로 소개된다. 현재 용산기지 안에 있는 해발 70m 높이 작은 언덕 이름도 둔지산이다. 둔지산, 둔지방은 ‘그리 높지 않은 둔덕과 같은 산’ 내지 ‘둔전(屯田: 군량미 마련을 위한 토지)을 부치던 곳’이라는 의미다.
1454년 세종실록의 ‘경도 한성부 지리지’에는 “노인성단, 원단, 영성단, 풍운뇌우단이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서도 한양 남쪽 교외에 있어 남단으로 불렸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기우제·기설제 등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1897년 고종이 서울 중구 소공동에 원구단을 지을 때까지 종묘·사직과 함께 임금의 가장 중요한 제사 장소였다. 용산기지에 남단 터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용산기지 가장 북쪽에 있는 캠프 코이너 일대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용산’의 정상(해발고도 76.7m)에 위치한 용산성당의 모습. 서울 마포구의 지하철 5·6호선 공덕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용마루고개 쪽으로 오르다가 고개 능선에서 한강변 쪽으로 우회전해 도착한 바로 그 곳은 용산 정상이었다.
둔지미·둔지방은 단순히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영조 때인 18세기 한양이 서남쪽으로 확대되면서 설치된 5개의 방(서강방, 용산방, 한강방, 두모방, 둔지방) 가운데 하나였을 정도로 컸다.
한성판윤을 지내다 72살이 되는 1784년 둔지산에 정자를 짓고 살았던, 조선시대 서화가 표암 강세황(1713~1791)은 문집 <표암고>(‘두운지정기’편)에서 둔지산 일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도성의 남대문을 나서 꺾어져 동쪽으로 10리 못 미친 곳에 둔지산이 있다. 봉우리와 바위, 골짜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산이라는 명칭이 있고, 둔전을 둔 땅이 없지만 둔전의 땅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는 정말 따져 힐난할 것은 되지 못한다. 들길이 구불구불하고 보리밭 두둑이 높았다 낮아지는데, 마을 수백 가가 있다.”(서울대 <관악어문연구> 제43권 참고)
19세기에 제작된 ‘동국여도’를 비롯해 ‘대동여지도’(경조오부) 등의 조선시대 지도에서도 ‘둔지산’, ‘둔지미’, ‘둔지방’이라는 지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제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 땅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며 만든 ‘한국용산군용수용지 명세도’ 등에 둔지산이라는 명칭을 기록해놨다.
‘용산·둔지산 제자리 찾기 운동’ 모임 발족도
이렇듯 역사적 사실관계가 명확한 이상, 이제라도 제각각 이름을 찾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학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김천수 실장을 비롯해 배우리 전 회장,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장, 김태우 신한대 교수, 최호진 지음건축도시연구소장 등은 지난 8일 ‘용산·둔지산 제자리 찾기 운동’ 모임을 발족시켰다. 이들은 서울시·용산구에 용산과 둔지산 정상에 표지판을 설치하고, 네이버·다음 등 포털에는 지도에 용산과 둔지산의 위치를 표시하도록 요청할 계획이다. 또 정부에도 용산공원 이름에 둔지산을 넣을 수 있도록 재고를 요청할 방침이다.
김천수 실장의 설명이다.
“외국 군대가 주둔하기 전 현재 용산기지라 불리는 지역에는 둔지미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고, 그들의 삶과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 삶의 터전이 일제에 의해 용산으로 둔갑했습니다. 지명은 언어와 문화의 화석과 같습니다. 용산기지를 또다시 용산공원이라고 부르게 되더라도, 원래 이곳의 산이 미군이 부르던 ‘드래곤힐’이 아니라 ‘둔지산’이라는 것, 그리고 인왕산으로부터 뻗어 있는 용의 형상을 한 용산이 따로 있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사진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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