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서울 금천구 독산동 ‘안양천 도시농업체험장’에서 금나래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들이 ‘홀태’로 벼를 탈곡하고 있다. 김선식 기자
“이게 밥 한 그릇이에요.”
문대상 향림도시농업체험원 회장이 논두렁 옆에서 나락 한 줌을 흔들며 말했다. “낟알 하나가 다 자라면 이렇게 불어나는 거에요.” 문 회장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어린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와아. 진짜에요? 쌀은 봤어도 벼는 처음 봐요.”
지난달 28일 서울 금천구 독산동 ‘안양천 도시농업체험장’에 금나래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 60명이 모였다. 추수철을 맞아 금천구 벼베기 체험 행사에 참여한 것이다. 이곳은 고층 아파트촌 사이를 흐르는 안양천변 도시텃밭이다. 지난 봄, 금천구는 무, 배추, 고구마가 자라는 밭과 밭 사이에 200㎡(60평) 규모의 논을 만들었다. 물을 잘 머금는 논흙을 깔고 안양천 물을 양수기로 끌어다 논에 물을 댔다. 강명희 금천구 도시농업팀장은 “애초엔 수생정원을 만들려고 했지만 천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주민들이 텃밭을 가꾸면서 농촌 풍경을 만끽할 수 있도록 논을 만들었다”며 “텃논은 주민들에게 분양하지 않고 모내기와 벼베기 등 체험 행사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안양천 도시농업체험장’에 있는 텃논. 김선식 기자
이날 일일 강사로 나선 문 회장이 말했다. “자 이제 40~50년 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했던 대로 벼 한 뭉치씩 낫으로 베고 탈곡까지 해보는 거에요.” 아이들이 장갑 낀 손으로 벼를 한 움큼 쥐어 당기고 문 회장과 함께 낫으로 벼를 벴다. 이어 벼를 훓는 농기구인 ‘홀태’(날 20개 가량이 촘촘한 쇠틀)에 볏단을 넣고 끌어당겼다. 벼 낟알이 “두두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재밌었는지 “한 번만 더!”를 외치며 낟알을 계속 털겠다고 나서는 아이도 있었다. 정아무개(11) 어린이는 “벼를 홀태에 긁어서 나락을 터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려서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백아무개(11) 어린이는 “벼가 까끌까끌한 촉감인 걸 처음 알았어요. 벼 냄새가 밥처럼 구수해요”라고 했다. 이아무개(11) 어린이는 “나락을 털다 보니 왠지 농부가 된 기분이에요. 앞으로는 밥을 남기지 말아야겠어요”라고 이날 체험 행사의 취지를 정확히 말했다. 한쪽에선 나락을 다 턴 아이들은 벼 이삭을 귓바퀴에 꽂아 멋을 부렸다.
서울 곳곳에 ‘도시텃논’이 생기고 있다. ‘일일 강사’ 문 회장이 이끄는 향림도시농업체험원도 지난 2015년 은평구 불광동 향림근린공원 안에 약 84평(278㎡)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다. 문 회장은 “사회공헌활동으로 지역 시민들과 같이 논 농사 체험 행사를 하고 매해 150㎏ 정도 수확해 ‘푸드마켓’에 기증한다”고 말했다. 도봉구 도봉동엔 총 6063㎡(약 1834평) 넓이 ‘무수골 논’이 있다. 조선 시대부터 대대로 지역 주민이 벼농사를 지어온 곳이다. 도봉구는 2016년부터 ‘무수골 논’ 1825㎡(약 552평)을 임대해 매해 구민들과 함께 모내기와 벼베기 체험 행사를 열고 있다. 강동구는 2012년 도시 텃밭 겸 휴식 공간인 상일동 ‘파믹스가든’에 텃논 128㎡(약 39평)를 만들었다.
지난달 24일 서울 번동 주공3단지 아파트 안에 있는 텃논에서 추수를 하고 있는 주민들. 이은수 제공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 벼 농사를 짓는 곳도 있다. 서울 강북구 번동 주공 3단지 아파트 주민들은 2018년 단지 유휴 공간 330㎡(100평)을 텃밭으로 조성했는데, 이듬해인 2019년 그중 33㎡(10평)를 논으로 만들었다. ‘논에 물 대기’ 전담 주민을 한 명 두고, 아파트 옥상 빗물을 20t 물탱크에 모아 논에 물을 댄다. 모내기와 벼베기는 아파트 주민들이 함께 참여한다. 모내기·벼베기 등 단체 행사 준비는 비영리 민간단체 ‘노원도시농업네트워크’와 ‘논살림사회적협동조합’이 돕고 있다. 이은수 노원도시농업네트워크 대표는 “텃밭은 분양 받은 내 구역에서 내 작물을 키워 먹는다는 공간이라면 텃논은 함께 모내기하고 추수하는 공동의 소유 공간”이라며 “아파트 논에서 같이 키우고 같이 먹으면서 주민들이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기쁨이 굉장히 높다”고 말했다. 번동 주공 3단지 아파트에 처음 논을 만들자고 제안한 방미숙 논살림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은 “요즘 도시농업에서 배제된 분들 중 하나가 육체적으로 농사를 짓기 어려운 분들”이라며 “이 아파트 주민들도 고령층이 많은데 직접 벼 농사를 짓기 어렵더라도 논을 바라만 봐도 옛날을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방 이사장은 “논은 10㎝ 정도 얕은 물이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를 유지해 생태계 다양성도 매우 풍부하다”며 “논 생태계는 물벼룩, 깔따구, 잠자리, 하루살이, 물방개 등 곤충과 식물 600종가량으로 구성된다고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 집계에 따르면 2011년 서울시 도시텃밭은 29.1㏊에서 지난 8월말 현재 218.9㏊로 약 7.5배 늘었다. 김형금 서울시 공원시민협력팀장은 “도시텃밭엔 노지, 학교, 옥상, 어린이집 등에 있는 텃밭이 모두 포함된다”며 “그 안에 ‘텃논’도 포함되지만, 아직까지 텃논은 규모가 작아 따로 집계하진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전업 농민은 대부분 강서구에 있다. 유보람 강서구 도시영농팀장은 “오래 전부터 개화동, 오곡동, 과해동 등에서 전업 농민들이 논농사를 짓고 있다”며 “실제로 벼농사를 짓는 강서구 전체 논 면적은 지난 8월 말 기준 259㏊”라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금천구 독산동 ‘안양천 도시농업체험장’에서 금나래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들이 벼베기 체험을 하고 있다. 김선식 기자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