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남산에 조성된 ‘기억의 터’ 공원 내 조형물 ‘대지의 눈’(왼쪽)과 ‘세상의 배꼽’. 서울시 누리집
서울시가 오는 4일 일본군 ‘위안부’를 추모하는 서울 중구 남산의 ‘기억의 터’ 조형물 철거작업에 돌입한다. 조형물 설치에 최근 성추행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미술작가 임옥상씨가 참여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기억의 터’에 있는 조형물들은 임씨 개인의 작업물이 아니라 국민 2만여명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집단 창작품’인만큼 성급한 철거 조처는 적절치 않다는 반발도 나온다.
‘기억의 터’ 조성 모금에 참여했던 시민 100명은 1일 입장문을 내어 “서울시는 ‘기억의 터’의 장소성과 역사성, 시민참여의 가치를 외면한 채 성급한 결정을 내려선 안 된다”며 철거결정 재고를 요구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 7월28일 시립 시설에 설치·관리 중인 임씨의 작품을 1심 판결이 난 뒤 철거한다고 밝힌 바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8월17일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임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서울 시립 시설에 설치된 임씨 조형물은 △중구 남산 ‘기억의 터’ △시청 서소문청사 앞 ‘서울을 그리다’ △마포구 하늘공원 ‘하늘을 담는 그릇’ △성동구 서울숲 ‘무장애놀이터’ △종로구 광화문사역 안 ‘광화문의 역사’ 5개다. 이중 ‘광화문의 역사’, ‘서울을 그리다’, ‘하늘을 담는 그릇’은 이미 철거가 완료됐다. 시는 이달 6일까지 나머지 두 조형물의 철거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논란이 되는 것은 남산 ‘기억의 터’에 있는 조형물들이다. 임씨 개인의 창작물이라기보다 집단의 의지를 모아 조성한 작품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기억의 터’는 서울시가 2016년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고 추모하자는 취지에서 조성한 공간이다. 여성계와 시민사회가 참여한 ‘설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시민 모금도 이뤄졌다. 당시 설립 모금에 참여했던 이들은 “임옥상씨 사건에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면서도 “임씨가 설계를 맡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은 집단 창작품인만큼 철거를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이곳에 설치된 ‘세상의 배꼽’에는 여성주의 작가 윤석남씨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대지의 눈’에는 김복동 할머니의 요청으로 ‘위안부 증언록’에서 발췌한 할머니들의 증언과 명단,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 ‘끌려가는 소녀’가 새겨져있다. 2016년 개막식 때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직접 와 둘러보기도 했다.
이들은 “임씨의 과오 때문에 할머니의 그림과 이름, ‘잊지 말아달라’는 아픈 증언까지 다 깨부숴야 하나”라고 반문하며 “역사는 지키고 개인의 잘못은 따로 따지고 싶다. 대책없이 철거한다면 반드시 2만여명의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임씨가 ‘기억의 터’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한 만큼 조형물은 그대로 두고 임씨의 이름만 지우는 방식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최영희 ‘기억의 터’ 설립 추진위원장은 “서울시가 분명 추진위원회, 모금 참여자 등 관계자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는 절차를 진행한다고 보도자료에도 밝혔는데 협의없이 급박하게 철거절차를 진행했다”고 비판했다. 추진위는 전날(8월 31일) 서울행정법원에 ‘공작물철거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이를 각하했다.
서울시는 다른 조형물과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철거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해당 공간은 계속 일본군 ‘위안부’를 추모하는 장소로 남는다. (대신) 내부를 재조성할 것”이라며 “추진위에서 이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 제안해주시면 적극 수용하겠다”라고 밝혔다.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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