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 무어스 ‘새와 생명의 터’ 대표가 12일 인천 옹진군 백령도 화동마을 들판에서 망원경으로 새를 관찰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후, 서해 최북단 외딴섬인 백령도의 텅 빈 들판에 푸른 눈의 외국인이 망원경을 들고 홀로 서 있었다. 머리 위로 군 헬리콥터가 굉음을 울리며 접근하자, 들판 옆 저수지에서 쉬던 기러기 수백마리가 깜짝 놀라 일제히 날아올랐다.
20여년간 남북한을 오가며 새와 서식지 보전활동을 해온 나일 무어스(56·조류학 박사) ‘새와 생명의 터’(버즈 코리아) 대표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들녘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천에서 뱃길로 191㎞, 북한 황해남도 장산곶과는 14㎞ 떨어진 백령도의 야트막한 산과 구릉, 해안 곳곳에는 중무장한 군인과 삼엄한 군사시설이 북의 공격에 대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2013년부터 해마다 이맘때면 백령도에서 2~3주씩 묵으며 새와 습지 조사를 해온 영국 출신의 무어스 박사는 백령도의 웬만한 택시기사나 식당·여관 주인들도 알아볼 만큼 친숙한 이웃이다.
나일 무어스 ‘새와 생명의 터’ 대표가 12일 인천 옹진군 백령도 화동마을 주변에서 새와 습지 조사를 하고 있다.
■ 7년째 백령도 생태조사 나일 무어스 박사 “2013년 이맘때만 해도 화동습지는 황새 17마리를 포함해 흑고니, 개리, 기러기 2천여마리가 찾아와 감동을 주었는데, 지금은 아무 가치가 없는 데드 스페이스가 됐어요.” 백령도 화동습지에서 만난 무어스 박사는 오리 몇 마리만 떠 있는 습지를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화동습지에 새가 오지 않게 된 것은 습지를 가로지르는 도로 개설과 섬 전체를 도배하다시피 한 콘크리트 제방 등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라고 했다. 콘크리트 공장이 3개나 있는 이 섬은 시멘트 도로와 수로, 다리, 대형 아파트단지 개발 등 섬 전체가 콘크리트로 덮여가고 있었다.
그가 서툰 한국말로 백령도가 ‘동아시아 철새의 이동 경로’로 중요한 지점이며 보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동안, 댕기물떼새와 말똥가리 무리들이 북쪽을 향해 쉴 새 없이 날아갔다. 지난 1일과 8일 백령도에서 처음 발견된 검은어깨매(검은죽지솔개)와 검은목두루미 등이 이날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꺼낸 수첩에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새의 종류와 마릿수, 관찰 시간과 장소가 기록된 메모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인천 옹진군 백령도 화동마을 들머리 담벼락에 주민 얼굴이 그려져 있다. 주민 대부분이 북한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 2세들이다.
무어스 박사는 “백령도는 새만금, 금강, 아산만 등과 견주면 북한과 인접해 아직은 환경이 좋고 생물다양성도 많은 편이지만 새의 종류와 개체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한반도와 산둥반도를 오가는 철새들의 정거장 구실을 하는 백령도에 국제공항이 들어서면 생태환경이 망가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국토교통부는 간척사업으로 불모지로 변한 127만㎡ 터에 민·군 겸용의 공항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백령공항 건설은 북방한계선(NLL)과 인접해 항공기 운항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던 국방부가 전격 동의하면서 탄력을 받고 있다. 백령공항은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1154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내년 착공해 2023년 완공하게 된다.
앞서 백령도는 1991년 시작해 2006년 완공한 간척사업으로 476㏊의 갯벌이 사라지고 간척지와 백령호가 생겼다. 남한에서 14번째 크기였던 이 섬은 간척사업으로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하지만 쌀이 남아돌아 농토가 더는 필요없게 되자 간척지는 황무지로 방치됐고, 담수호 또한 염분 농도가 높아 농업용수로도 쓸 수 없는 상태로 버려졌다.
지난 13일 오후 바다 건너 북한 황해남도 장산곶이 건너다보이는 인천 옹진군 백령도 두무진에 내걸린 태극기가 강한 비바람에 반쯤 찢어진 상태로 나부끼고 있다.
결국 주민들만 굴, 꽃게, 가자미 등이 넘쳐나던 황금어장을 잃고, 갯벌에 깃들여 살던 생명들도 보금자리를 잃었다. 간척사업 이후 비행기가 뜨고 내릴 만큼 모래가 단단해 한국전쟁 당시 천연 비행장으로 사용됐던 사곶해변(천연기념물 391호)은 조류 흐름의 변화로 푸석푸석한 모래밭으로 변했다.
무어스 박사는 “공항이 들어서면 관광객이 찾아오기는 쉽겠지만 환경은 파괴되고 섬은 쓰레기 등으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라며 “한국이 1970~80년대처럼 돈 없는 나라도 아닌데 경제 마인드로만 생각하면 좋은 미래가 없다. 새로운 생각,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백령도는 빼어난 경관과 섬이 지닌 역사, 문화, 생태 등 지속가능한 생태·평화 관광지로서 가치가 높다. 논밭과 습지, 갯벌 관리를 잘하고 황새를 복원하면 외국처럼 팜스테이 관광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 외국 연구자가 본 남북 비무장지대 생태계 무어스 박사처럼 10년 넘게 남북을 오가며 한반도의 생태 평화를 연구해온 외국인 연구자들은 더 있다. 15년 전부터 북한에서 산림복원, 유기농법 등 협력사업을 해온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의 베른하르트 젤리거(49·경제학 박사) 대표와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를 지낸 아마엘 보르제 박사(현 중국 난징임업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새와 생명의 터’ 조사 결과, 한반도에서는 약 540여종의 조류가 관찰되었으며, 특히 비무장지대 일원에서는 아물쇠딱따구리와 두루미, 기러기 등 멸종위기종이 더 많이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민통선지역과 국경지대가 외부 방해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개발 압력이 적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무어스 박사는 “최근 고성지역에서 쇠가마우지 수천마리가 밤에는 디엠제트 북한 쪽 해금강 바위에서 쉬고, 낮에는 남한의 거진곶 바다로 먹이를 구하러 오는 것을 확인했다”며 “디엠제트와 접경지역은 육상·해양 생물들의 실제 보호지역으로, 생물다양성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적절히 관리해주면 개체수를 유지하고 영역을 확대해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은 동아시아~오스트레일리아 간 철새 이동 경로의 중심지로서 철새들의 서식지 보호를 위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50년간 서해안의 습지는 남한의 무분별한 개발로 66%나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 남한만의 일방적인 비무장지대 개발계획 멈춰야 연구자들은 북한에서도 갯벌 매립과 삼림 벌채, 강 준설 등 개발이 일어나지만 남한과 견주면 덜 파괴적이라며, 남한 정부가 일방적인 개발을 멈추고 국경 일대 습지에 대한 보호지역 지정과 람사르 사이트 가입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4일 오전 백령도 진촌리 주민들이 용치가 늘어선 마을 앞 하늬해변에서 굴을 따고 있다.
무어스 박사는 “남한은 디엠제트를 평화 프로세스의 한 부분으로 보고 디엠제트의 미래에 대해 여러 개발계획을 제안하고 있지만, 이런 제안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해가 부족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며 “북한과 공식 합의된 개발이 아니라면, 디엠제트 안이나 디엠제트에 직접 영향을 주는 개발계획 일체를 중단해야 한다. 그 대신 디엠제트 일원의 땅을 사들이고 해당 지역 농민들을 지원해 생물다양성을 늘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젤리거 박사도 “디엠제트 일원이 세계적인 생태·평화 관광지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건물이나 도로를 만들지 말고 자연보호지역으로 통합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르제 박사는 “현재 벌어지는 개발 프로젝트가 많은데다 수륙양용 생물을 위한 서식공간이 거의 없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파괴되고 있는 디엠제트 남쪽의 서식지 악화를 막고 야생생물을 보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말했다.
백령도/글·사진 박경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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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해안에 세워진 천안함 46용사 위령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