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사건 현장을 수색하는 경찰관들. 연합뉴스
1986~1991년 사이 당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여성 10명이 살해돼 전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며 최악의 장기미제사건으로 기록됐던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경찰 수사가 마무리됐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2일 오전 10시께 경기 수원시 경기남부청 본관 5층 강당에서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1일 밝혔다. 30여년간 범인의 윤곽조차 나오지 않았던 이 사건은 지난해 7월 당시 사건 현장의 증거물에서 채취한 디엔에이(DNA)가 처제 살해 혐의로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이춘재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재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의 재수사 결과, 이춘재는 화성 일대에서 14명을 살해하고 9건의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공소시효가 지난 만큼 이춘재를 처벌할 수는 없지만, 이번 수사를 통해 미궁에 쌓여 있던 사건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상처를 받은 모든 분께 다시 한번 위로와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1986년 9월15일∼1991년 4월3일까지 화성시 태안과 정남, 팔탄, 동탄 등 태안읍사무소 반경 3㎞ 내 4개 읍·면에서 13∼71살 여성 10명을 상대로 벌어진 엽기적 연쇄살인 사건이다. 잔인한 범행 수법과 경찰 수사를 비웃듯 반복돼 경찰은 물론 온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사건 해결을 위해 동원된 경찰은 연인원 205만여명이고, 수사대상자는 2만1280명, 용의자는 3천명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3차례 경찰조사를 받았던 ㅊ(당시 38살)씨는 1990년 3월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또 1991년 4월 10차 사건 용의자였던 ㅈ(당시 32살)씨 역시 아파트 4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7차 사건 용의자로 몰렸다 풀려난 ㅂ씨도 아버지 무덤 근처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특히 4차와 5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경찰에서 고문 등 강압수사를 받은 김아무개씨는 후유증에 시달리다 1997년 스스로 생을 내려놓는 등 2차 피해도 속출했다. 뿐만 아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 4명은 일선에서 물러난 뒤 과도한 스트레스로 숨져 경찰에 커다란 자괴감을 안겨줬다.
이에 경찰은 공소시효 만료 이후에도 수사를 계속해왔다. 1년에 10여건 이상의 제보가 들어왔고, 지난 6월께 유의미한 제보를 받은 경찰은 그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유전자분석기술을 수사에 동원해 개가를 올렸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윤아무개(53)씨가 지난해 11월13일 재심을 청구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8차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박아무개(당시 13살)양의 집에서 박양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피해자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옷가지로 손발을 묶는 등의 다른 연쇄살인 사건과 수법이 달랐다”며 모방범죄로 결론을 내렸다. 이어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윤씨의 지문과 체모도 나왔고, 윤씨가 범행 정황을 상세히 자백했다”며 1989년 7월 윤씨를 검거해 범인으로 발표했다. 특히 경찰은 디엔에이 분석기법이 없던 당시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을 통해 윤씨의 체모와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가 같다는 결론을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만큼 수사과정에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입장도 내놨다. 이 때문에 윤씨는 20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됐다.
그러나 이춘재씨가 8차 사건을 포함한 10건의 화성 사건과 다른 4건 등 14건의 살인을 자백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진범 논란이 벌어졌고, 윤씨는 재심을 청구했다. 검찰과 경찰도 최근 이 사건과 관련해 윤씨에 대한 가혹행위가 있었고, 결정적 증거물도 조작됐다며 당시 수사관과 검사 등을 입건하기도 했다.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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