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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새도 수리 안 해주더니”…쪽방촌 집주인들 갑자기 ‘상생’ 왜?

등록 2021-04-25 15:33수정 2021-04-26 02:30

공공주택개발 반대하며 세입자에 “더 좋은 집 지어주겠다”
주민들, 건물주에 분노 “공공주택 개발 흔들림 없이 추진을”
지난 20일 오후 공공주택사업 예정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집주인들이 설치한 공공주택사업 반대 펼침막이 걸려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20일 오후 공공주택사업 예정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집주인들이 설치한 공공주택사업 반대 펼침막이 걸려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토지 강제수용 결사반대, 제2의 용산참사 피바람 각오하라” “약자보호 명분 내세워 사유재산 탈취하는 정부를 규탄한다.”

지난 2월5일 정부가 전국 최대 규모인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을 공공주택으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이 지역 토지·건물 소유주들은 이런 ‘험악한’ 펼침막을 내걸었다. 건물마다 빨간 깃발도 걸렸다. 그러나 이 펼침막은 지난 14일께 ‘둥글둥글’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쪽방 주민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민간개발, 동자동 주민대책위원회가 만들겠습니다.”

정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를 공동사업시행자로, 서울역 근처 동자동 일대 4만7천㎡에 공공주택 1450호(임대 1250호, 분양 200호), 민간분양주택 960호를 짓기로 했다. 쪽방 주민들은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으며,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임시거주지도 제공된다.

하지만 소유주들은 반대한다.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개발할 경우 무주택자에게만 아파트 입주권이 나오는 등 민간개발에 견줘 소유주에게 돌아오는 개발이익이 적다는 이유에서다. 정부 발표 초기 “내 무덤 위에 공공임대 지어라” 하며 극력 반발하던 소유주들은 이제 ‘쪽방 주민들과 함께’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사이 무슨 변화가 있던 것일까.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토지 소유주들이 내건 펼침막. 위 현수막은 지난 14일께 아래 현수막으로 바뀌었다. 동자동사랑방 제공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토지 소유주들이 내건 펼침막. 위 현수막은 지난 14일께 아래 현수막으로 바뀌었다. 동자동사랑방 제공

지난 20일 한평(3.3㎡) 남짓한 동자동 한 쪽방에서 만난 윤용주(59) 동자동사랑방(쪽방주민 자조조직) 운영위원은 이러한 소유주들의 태도 변화가 “웃기지도 않고 유치하다”고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사업에 실패한 뒤 1999년부터 20년 남짓 이곳 쪽방촌에 살고 있다는 윤 위원은 “건물주들은 물이 새고 천장이 무너져도 집수리 한번 안 해줬다. 사람이 죽어도 방세 내놓으라고 한 사람들이다. 주민들을 혐오하면서도 돈만 벌어갔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함께하자고 한다는 것이 기가 찬다”고 했다.

제대로 된 화장실도, 부엌도 없고 창문이 없어 볕도 들지 않는 한평 남짓한 방이지만 월세는 24만원 수준이다. 평당 임대료로 따지면 고급아파트보다 훨씬 비싼 셈이다. 건물은 갈수록 낡아가지만, 정부가 지급하는 주거급여가 오르면 월세도 따라 올랐다. 건물주들은 동네에 살지 않고 관리인을 통해 월세를 받아갈 뿐이었다. 그런 소유주들이 이제 와서 ‘함께하자’ ‘우리 얘기도 들어달라’고 나서자 쪽방 주민들은 어이없어하는 분위기다.

공공주택사업 예정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사업을 반대하는 의미로 집주인들이 빨간 깃발을 걸어 놓았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공공주택사업 예정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사업을 반대하는 의미로 집주인들이 빨간 깃발을 걸어 놓았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소유주들이 동네에 붙인 유인물을 보면 “저희는 쪽방 주민 여러분들을 내쫓을 생각이 전혀 없다. 닭장 같은 쪽방에서 또다른 쪽방으로의 이전이 아닌 집다운 집, 질 좋은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말이 적혀 있다. 오정자 동자동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정부가 발표한 고밀개발계획에 따라 용적률 700%로 민간개발하면 공공임대를 1700가구, 민간분양을 1900가구 공급할 수 있다”며 “그동안 용적률을 높여달라고 애걸했는데 공공개발로 하면 되고 민간이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다.

하지만 세입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다. 윤 위원은 “이미 2015년에 이곳이 후암동 특별계획구역으로 지정돼 개발이 추진됐지만, 소유주들끼리 합의가 안 돼 실패했다. 그땐 쪽방 주민들의 의견을 물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쪽방촌에 살면서 병을 얻어 무릎 아래로 두 다리를 절단해 밤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의족을 끼고 서울역이나 공원까지 나와야만 했다는 윤 위원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냐는 생각에 우울증도 심하게 왔었다”며 “천장에서 물 새는 것, 화장실 갈 걱정 없이, 방 안에 가스버너 놓고 라면 끓여 먹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살 권리는 있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예정지 쪽방촌에서 동자동 사랑방 활동가가 주민들에게 공공주택사업에 찬성하는 `동자동 쪽방 공공주택사업 대책 모임' 가입을 받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예정지 쪽방촌에서 동자동 사랑방 활동가가 주민들에게 공공주택사업에 찬성하는 `동자동 쪽방 공공주택사업 대책 모임' 가입을 받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애초에 용적률 상향 등은 공공개발이기 때문에 특혜가 부여된 것인데, 민간개발에도 이런 인센티브를 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공공주택 건설과 개발이 이뤄지는 동안 주거를 제공하는 이주대책은 공공이 갖고 있는 권한에 따른 것으로, 민간개발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현될 수 있을지가 의문”이라고 말했다.

공공주택 사업은 지난 2월19일 주민 등 의견 청취를 마쳤고, 올해 안에 국토교통부가 공공주택지구 지정을 완료하면 내년부터 지구계획 승인과 보상 절차가 진행되며, 2023년 임시이주와 공공주택단지 착공에 들어간다. 입주는 2026년이고 2030년에 민간분양 택지개발이 완료된다.

다만 공공주택 계획이 발표된 이후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간주도 재개발을 공약한 오세훈 시장이 당선된 게 변수다. 국민의힘은 지난 14일 소유주들과 간담회를 열어, 정부의 공공주택 사업을 ‘재산권 침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윤 위원은 “오 시장이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을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따져봤으면 한다”며 “이번 공공주택 사업이 쪽방 주민은 물론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주거권을 보장하는 하나의 표본으로 생각하고 흔들림없이 추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쪽방 주민들은 동자동사랑방을 중심으로 공공주택 개발에 찬성하는 주민들의 뜻을 모으면서 향후 사업 추진에 주민들의 의견을 전달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개발계획이 발표됐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개발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줄 아는 이들도 적지 않아, 쪽방을 한집씩 찾아다니며 의견을 모으는 중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20일 오후 공공주택사업 예정지인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서 주민 강동근씨가 `내가 살기 편한 집'이라는 문구를 공공주택사업 환영 종이에 적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일 오후 공공주택사업 예정지인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서 주민 강동근씨가 `내가 살기 편한 집'이라는 문구를 공공주택사업 환영 종이에 적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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