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와이너리 김영, 윤영준 부부가 와이너리 체험 카페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오윤주 기자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이 지나고 하늘이 높아지면, 충북 영동은 발그레 취한다. 포도가 영그는 지금 술 익는 마을로 변신 중이다.
지난달 19일 바람도, 구름도 쉬어 간다는 소백산맥 언저리 영동읍 산막골을 찾았다. 좁은 길을 따라 산 아래 막다른 곳에 이르니 산막와이너리 안내판이 반긴다. 주변엔 포도를 주렁주렁 매단 포도밭이 끝없이 산에서 산으로 이어진다.
포도밭 옆 건물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큼한 향이 코를 찌른다. 단박에 와인(포도주) 향이란 걸 알아챌 정도다. 벽을 가득 메운 그림, 샹들리에, 가지런한 탁자, 잔잔한 음악까지…. 영락없는 산속 비밀의 화원이다.
윤영준 산막와이너리 부장이 와인 발효 과정 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오윤주 기자
“먼 걸음 하셨네요. 와인 만드는 데가 아니라 카페 같죠.”
잘 익은 포도처럼 까무잡잡한 얼굴의 윤영준(45) 산막와이너리 부장이 명함을 건넸다. 산막와이너리는 2016년 본격적으로 와인을 내놓은 늦깎이지만 국내외에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산막와이너리 비원(비밀의 화원)’은 지난해 런던 와인품평회, 올해 파리 와인컵에서 실버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주류대상 등에서도 상을 휩쓸었다. 윤 부장은 “늦게 시작했지만 포도 재배·선별, 숙성 등 꼼꼼하게 품질을 관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직접 관리한 포도·산머루 등 재료가 좋다”고 말했다.
산막와이너리는 가족 중심 농가형 와이너리다. 2009년 그림 그리려 귀촌한 김정환·안성분 부부가 포도·산머루 등을 재배하다 와인으로 방향을 틀었고, 딸 김영씨와 사위 윤씨가 합류했다.
영국 런던 와인품평회에서 실버상, 브론즈상을 수상한 산막와이너리 비원.
산막와이너리에서는 올해 포도 30~40t으로 와인을 빚어 750㎖ 4만병 안팎을 제조할 참이다. 딸 김씨는 “코로나 영향으로 오프라인은 주춤했지만 온라인 판매가 늘어 50~60% 정도 매출이 늘 것으로 기대한다”고 귀띔했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차로 5분 남짓 떨어진 곳에 또다른 와이너리인 컨츄리와인이 있다. 마을 안 포도 벽화가 정겹다.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민간인이 희생된 노근리 사건 피해 마을인데, 이젠 와인이 더 유명하다. 컨츄리와인은 3대째 이어진 포도·와인 집안이다. 김덕현(38) 대표는 “일본 강점기에 서태평양 미크로네시아섬으로 강제노역 갔던 할아버지가 돌아와 포도를 재배했고, 이를 물려받은 아버지께서 1965년부터 가양주로 와인을 빚었는데 제가 이어받았다”고 했다. 김씨도 와인아카데미, 유원대 와인사이언스학과 등에서 와인을 공부했다.
김덕현 컨츄리와인 대표가 포도 와인의 숙성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오윤주 기자
컨츄리와인은 해마다 30t 안팎의 포도로 와인을 빚는데, 모두 이웃 포도를 수매한다. 김씨는 “마을 포도를 쓰면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로 와인을 빚을 수 있고, 중간상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재배 주민에게 시중 값보다 나은 수맷값을 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와인병·마개 유통법인을 만들어 영세 와이너리들과 공유하기도 한다.
산막, 컨츄리 같은 영동지역 와이너리는 41곳에 이른다. 전국 와이너리(253곳)의 16%를 차지한다. 포도뿐 아니라 산머루·사과·블루베리 등으로 와인, 증류주 등을 빚는다. 국산 와인 ‘샤토마니’를 제조하는 와인코리아만 기업형이고, 나머지는 가족 등이 운영하는 농가형이다.
지난해 기준 이들 와이너리 41곳에는 93명이 일하고 있다. 220품목 33만병(750㎖)을 판매해 매출 64억원(기업형 40억원, 농가형 24억원)을 올렸다. 농가 와이너리 14곳(35%)은 대를 이었다. 김덕현 컨츄리와인 대표는 “농가 와이너리들이 자리 잡으면서 와인으로 귀농·귀촌하려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줄고 있는 영동 인구 회복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영동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포도 산지였다. 1930년대 일본인 가쿠타니가 영동읍 회동리에서 캠벨얼리 품종을 재배한 이후 영동 곳곳으로 번졌다. 2006년 4655농가가 2466㏊에서 4만1477t을 생산했다. 하지만 2015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기점으로 사양길로 접어들어 2018년엔 2169농가 950.89㏊로 줄었다. 12년 새 농가 수는 53.4%, 재배면적은 61.5%가 줄었다.
그러다가 2019년 2230농가 958㏊, 지난해 2346농가 987㏊로 반등했다. 주상훈 영동군 과수원예팀 주무관은 “최근 샤인머스캣 품종이 인기를 끌면서 포도 재배가 조금씩 늘고 있다. 와이너리가 자리 잡은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영동 와인터널을 찾은 시민들이 와인을 둘러보고 있다. 영동군 제공
영동군은 대표적 특산품인 포도가 흔들리자 교체 카드로 와인을 택하고, 농가 와이너리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군 농업기술센터에 와인산업팀을 설치하고, 교육-제조지원-컨설팅-포장지원-홍보마케팅 등 와인 창업 5단계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을 지원했다.
지역에 있는 유원대 와인사이언스학과는 영동와인연구회 등과 농가 와이너리에 와인 양조·유통·마케팅 기법 등을 지원했다. 영동 와인터널, 와인축제, 캔와인 개발, 오크통 제작 등도 영동 와인 대중화에 한몫하고 있다. 정재운 영동와인연구회장은 “영동 와인은 민·관·산·학 상호 연계의 합작품”이라며 “포도 생과 판매보다 와인 등 가공품 소득이 높아 와이너리가 는다”고 했다.
2014년 문 연 와인연구소는 농가 와이너리에 와인 품질 분석, 토종 효모 지원, 가공품 개발 등 도움을 준다. 유병호 유원대 와인사이언스학과 교수는 “농가에서 개발한 와인을 들고 수시로 학교를 찾아온다. 솔직히 초기엔 삼키고 싶지 않은 와인도 있었지만 지금은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계도 있다. 와이너리가 늘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08년 이후 34곳이 문을 닫았다. 품질 관리 또는 판로 개척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영동군의 출자 등으로 1996년 문을 연 와인코리아는 영동 원조 격인 포도와인 부문을 사실상 접는 수순을 밟고 있다. 윤태림 와인코리아 대표는 “해마다 100t 이상 포도를 수매해 와인을 제조해야 하는데 수매 여건 등이 여의치 않아 전통주, 과실 발효주 등으로 품목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용 영동군농업기술센터 와인산업팀 주무관은 “기업형 와인코리아가 맏형처럼 대내외적으로 와인을 알리고, 농가 와이너리가 저마다 특색을 내야 영동 와인이 상생하는데 둘 사이 융합이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한겨레>와 현장을 동행한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이사장은 “와인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행정의 역할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영동군은 영세 농가 와이너리의 한계 극복을 위해 공유 와이너리 건립에 나섰다. 국비·군비 등 70억원을 들여 4500㎡ 규모의 공장형 와이너리를 만들어 효율적·과학적으로 품질을 관리하고, 여과기 등 고가 장비도 공유하는 형태다. 선도 와이너리 12곳이 동참했으며, 내년 상반기에 문을 연다.
김금숙 영동군농업기술센터 와인산업팀장은 “솔직히 품질이 좋고, 유통 구조가 탄탄한 와이너리는 10곳 안팎이다. 포도 재배, 와인 제조에만 익숙한 농민이 유럽 등 질 좋은 와인과 경쟁하는 데 한계가 있다. 소비자 수요와 가격 경쟁에 밀리지 않는 품질 다각화가 숙제”라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포도재배-와인-체험관광 유기적 네트워크 돋보여
기업형-농가형 상생·융합 적극적 행정 역할 강조돼
영동 포도·와인을 둘러싼 민·관·학·연의 유기적 네트워크는 2005년 추진된 영동포도 클러스터 사업에서 시작돼 16년째 탄탄하게 작동하고 있다.
영동군은 포도 농가와 귀농·귀촌인들이 와인산업에 쉽게 진입하도록 돕기 위해, 영동군농업기술센터에 와인산업팀을 설치했다. 지역대학의 역할도 크다. 농가형 와이너리 종사자들 교육의 중심축은 군에서 지원하는 와인아카데미 과정과 유원대 와인발효학과(현 와인사이언스학과) 교육과정이다. 충청북도농업기술원이 설립한 와인연구소는 기술이전을 담당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포도재배(1차산업) △와인가공(2차산업) △체험관광(3차산업) 등이 결합한 영동 포도와인 6차산업이 농가소득 증대와 귀농·귀촌 활성화를 이끌었다.
영동 와인산업에 따스한 햇살만 비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와인산업의 맏형 몫을 맡아줘야 할 기업형 와이너리인 와인코리아의 역할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산업 형성 초기 영동군은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와인코리아를 육성했고, 이를 통해 영동 와인의 인지도 제고와 관련 관광산업 육성을 이루려고 했다. 그런데 부자재 공동구매, 와이너리 간의 체험관광 연결, 박람회 공동참여 등 맏형이 수행할 법한 활동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와이너리들 역시 경쟁보다는 상생에 초점을 맞춰 6차산업 고도화를 위해 좀 더 힘을 합해야 한다.
행정의 적극성도 필요하다. 예컨대, 선도 농가 와이너리 12곳이 참여해 내년 상반기 문을 여는 와인공장의 경우, 적지 않은 군 예산이 투입되지만 영동군의 역할과 관련한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다수의 농가가 참여하는 만큼 의사결정과 경영 일반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영동군이 사전교육 등을 충실히 수행할 필요가 있다.
박지호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jh@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