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대덕구 오정동에 사는 최태웅(12)군이 지난 17일 오전 오정동행정복지센터에서 어린이 용돈수당 신청을 한 뒤 센터 직원으로부터 수당이 들어오는 ‘드림카드’를 받고 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대전 대덕구 화정초등학교에 다니는 최태웅(12)군은 지난 17일 엄마 손을 잡고 오정동행정복지센터를 찾았다. 대덕구 어린이 용돈수당을 받을 수 있는 ‘드림카드’를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최군은 엄마와 센터 직원의 도움을 받아 직접 용돈수당 신청서를 써내려갔고, 신청서를 내 뒤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엄마에게서 일주일에 5천원씩 받는 용돈 말고 또다른 용돈이 용돈을 받게 된 최군은 “이미 계획을 세웠어요. 용돈수당을 모아 형·동생 생일선물을 사줄 거예요”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야심찬(?) 계획에 당황한 어머니 신미선(44)씨는 “세 아이 용돈을 감당하려면 조금 벅찼는데, 용돈수당 소식을 듣고 가계부담을 덜 것 같아 기뻤다. 용돈수당으로 새학기 준비물을 사자고 하려 했는데, 아이랑 협상을 잘 해봐야겠다”며 멋쩍게 웃었다.
대전 대덕구가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어린이들에게 기본소득의 일종인 용돈수당을 지급하기로 해 관심을 끌고 있다. 대상은 관내 10살 이상~12살 이하(4~6학년) 어린이 4300명이고, 지급액은 매달 2만원이다. 지난 17일부터 각 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수당 지급을 위한 ‘어린이 드림카드’ 신청을 받고 있다. 드림카드에 지역화폐인 대덕이(e)로움을 충전해주는 방식으로 용돈이 지급되면 대덕구 안에서 체크카드처럼 사용할 수 있다. 사용처는 대덕이로움 가맹점 중 서점·문구점·완구점 등으로, 일반음식점·마트·학원·병원 등에서는 쓸 수 없다.
대덕구는 자녀 양육의 경제적인 부담을 낮추고 어린이의 소비권리를 보장하면서, 어린이가 합리적인 경제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어린이 용돈수당을 추진해왔다. 박정현 대덕구청장은 “어린이 용돈수당은 단순히 아이에게 용돈을 준다는 의미를 넘는다”며 “초등 4학년부터 시작하는 경제교육과 맞물려 계획해 용돈을 쓰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배운다. 또 아이들은 용돈수당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동네서점·문구점 등에서 용돈수당을 쓰면서 지역공동체에도 기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모든 학생에게 매주 2천원씩 기본소득을 주는 충북 보은 판동초. 학생들은 이 돈으로 매점에서 자율적으로 상품을 구매한다. 판동초 누리집
대덕구에 앞서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에서도 또다른 어린이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 중이다. 2020년 10월부터 매주 전교생 48명(유치원생 11명 포함)에게 학교 자체화폐로 매주 월요일 2천원씩을 줬는데, 11월에는 지급액이 3천원으로 올랐다.
아이들은 이 돈으로 협동조합 매점인 빛들마루에서 과자나 음료수 등을 살 수 있다. 이 제도를 구상한 강환욱 교사는 “학교에 매점이 생긴 뒤 봐보니 용돈이 없어 매점을 이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어떤 아이라도 매점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싶었다”며 “선별해서 주면 받는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트릴 수 있어 조건 없이 모두에게 주기로 하고 ‘어린이 기본소득’이라 이름 붙였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도입하자 예전에는 3명 중 1명 정도만 찾던 매점을 이젠 대부분 아이가 찾게 됐다고 한다. 기부 문화도 생겼다. 누군가 ‘잔돈샘’에 쓰고 남은 동전을 기부하면 필요한 학생이 눈치보지 않고 가져다 쓰면 된다. 누구도 기부를 강요하진 않지만, 샘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어른들이 돈을 주고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돈을 쓰며 겪는 시행착오도 큰 배움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기본소득 재원은 기부금으로 충당했으나, 기부금이 떨어지면 학교 예산을 배정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강 교사는 “판동초에는 운 좋게 매점이 있어 아이들의 권리 격차를 발견했지만, 도시에 있는 큰 학교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대덕구 같은 지자체가 늘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판동초와 비슷한 시기 충북 옥천에서는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이 이뤄졌다. 옥천지역 ‘청년모임 투(Too)’의 제안으로 서울시 청년허브가 예산을 지원해 2020년 9∼10월 6주 동안 안내면 안내중학교 전교생 18명에게 2차례에 걸쳐 10만원씩 20만원어치 지역화폐인 향수OK카드로 지급됐다. ‘청년모임 투’의 박누리(37)씨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던 차에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서울 밖 지역 청년활동도 지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갈 곳 없는 지역 청소년들에게 공동체가 ‘비빌 언덕’이 돼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실험기간 학생들이 작성한 일지에는 “가족에게 밥을 살 수 있었다” “친구와 자주 만나 놀 수 있게 됐다” “꿈과 관련된 도서를 구매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됐다. 실험이 끝난 뒤 청년모임 투는 토론회를 열어 ‘옥천지역 13∼19살 청소년 2800여명에게 매월 5만원씩 지급하자’고 제안했고, 옥천군의회는 지난해 6월 만 13∼15살(중학생) 청소년에게 연 7만원, 16∼18살(고등학생) 청소년에게 연 10만원 바우처를 지급하는 내용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경남 고성에서도 옥천에서와 비슷한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고성군은 지난해 1월부터 지역의 13∼18살(중·고교생) 청소년 모두에게 바우처 카드 형태로 매달 5만원(13∼15살)과 7만원(16∼18살)을 지급한다. 바우처 카드에 적립된 포인트는 고성군 내 가맹점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다. 지난해 바우처 사용실적을 보면, 전체 사용금액 17억8402만원 가운데 17.5%(3억1214만원)가 서점에서 사용됐다. 문구점(13.9%), 음식점(11.7%), 의류점(10.8%), 편의점(10.1%)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 밖에 미용실, 안경원, 병원·약국, 독서실, 체육시설 등에서도 쓰였다.
윤지성 고성군 청소년팀장은 “수당을 먹는 데만 쓸 거라는 어른들의 우려와 달리 아이들은 자기계발을 위해서도 돈을 썼다”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만 이어지는 2년짜리 사업이지만, 지난해 사업 성과를 분석해 사업을 기간을 더 연장할지를 올해 안에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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