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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청년, 동네주민과 작당하다…대전 ‘어궁동’에 무슨 일?

등록 2023-04-11 08:00수정 2023-04-25 14:30

카이스트 어은동+충남대 궁동 사이 지역
창업청년들 모여 동네주민들과 마을재생
지난해 12월 열린 ‘어궁짝꿍’ 행사에서 참여자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윤주선 제공
지난해 12월 열린 ‘어궁짝꿍’ 행사에서 참여자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윤주선 제공

‘어은동+궁동=어궁동?!’

대전 유성구 어은동의 카이스트와 궁동의 충남대 사이. 어은동에 속해 있지만 도로 하나를 경계로 카이스트생들도 거의 찾지 않고, 충남대생들도 넘어오지 않는 동네에 청년들이 들어온 건 2010년이다. 지식 공유 플랫폼인 테드엑스(X)를 통해 모인 청년들 몇몇이 카이스트와 충남대 사이 외딴섬과 같던 동네에 ‘벌집’이라는 협업 공간을 만들면서다. 청년들이 모여 소통하고 각자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프리랜서 웹디자이너, 축제기획자, 청소년교육사업가, 프로그래머, 대학생 등 다양한 직업의 청년들이 작당 모의를 했다. 지역잡지와 청년잡지를 만들고, 축제와 콘퍼런스도 기획했다. 나중에는 100명이 넘는 청년들이 벌집을 이용했다. 이들에게 벌집은 단순히 일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터이자 놀이터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커뮤니티였다. 언제부턴가 청년들은 벌집이 있는 그 동네를 ‘어은동과 궁동 사이’라는 의미를 담아 ‘어궁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020년 열린 어궁동의 ‘안녕, 마을’ 축제 때 모습. 윙윙 제공
2020년 열린 어궁동의 ‘안녕, 마을’ 축제 때 모습. 윙윙 제공

인스타그램 계정 ‘eogung-dong(어궁어궁)’을 관리하는 조은정씨. 최예린 기자
인스타그램 계정 ‘eogung-dong(어궁어궁)’을 관리하는 조은정씨. 최예린 기자

어궁동에서 재미난 일을 만드는 사람들

인스타그램 계정 ‘eogung-dong(어궁어궁)’을 관리하는 조은정(26·충남대 건축학과 4학년)씨가 어궁동과 관계를 맺게 된 건 지난해 11월이다. 학과 교수님 소개로 어은동과 궁동 지역 상인들을 인터뷰하고 다른 지역 상인들과 짝을 지어 세미나를 여는 ‘어궁짝꿍’이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다. 프로젝트를 하기 전까지 경기도 수원이 고향인 그에게 어은동과 궁동은 ‘학교 근처’일 뿐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상인들을 만나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이런 곳도 있구나, 이런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구나, 인식하게 됐어요. 언젠가 떠날 곳이라고만 여기던 곳이 내가 사는 ‘동네’로서 친밀해진 거죠.”

카이스트 디자인전략연구실 박사연구원이자 벌집의 일원인 우은지(32)씨는 어궁동에서 지난 3월 열린 ‘해커톤 엠엘비(MLB: Make Local Better)’ 대회를 기획했다. 해커톤이란 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로, 한정된 시간에 기획자·개발자·디자이너 등으로 구성된 팀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우 박사는 산업디자인 회사인 조스리스튜디오와 함께 ‘어궁동 가게 사장님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대회를 기획했다. “대학가인 이 동네 친구들은 동네에 미련이 없어요. 가게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동네와 연결점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대회가 끝난 뒤 가게 사장님과 동료애가 느껴졌다는 후기도 있었죠.”

카이스트 디자인전략연구실 우은지 박사연구원. 우은지 제공
카이스트 디자인전략연구실 우은지 박사연구원. 우은지 제공

은정씨와 우 박사는 지난 3월 이런 프로젝트들을 모은 ‘대전 유성 동네 프로그램’을 어궁동에서 진행했다. 지난해에 이은 어궁짝꿍 시즌2와 해커톤 엠엘비,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어궁동으로 모으는 ‘취향모임’, 지역 활성화를 위한 ‘지역관리회사’의 필요성과 역할을 논의하는 ‘지역관리회사 포럼’도 프로그램으로 준비했다. 이 작당에는 로잇스페이스, 조스리스튜디오, 은유림, 스튜디오우당탕탕 등 청년 창업가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엔 어궁동의 ‘윙윙’이 있었다.

이태호 윙윙 대표. 윙윙 제공
이태호 윙윙 대표. 윙윙 제공

‘벌집’을 넘어 ‘벌들의 마을’로

윙윙은 ‘벌집’의 청년들이 2017년 창업한 스타트업이다. 어궁동에서 ‘작당’을 이어갈 공간과 자본이 필요해 벌인 또 하나의 작당이었다. ‘벌집’을 넘어 ‘벌들의 마을’(Bee-Park)을 만들어보자는 포부였다. 어궁동을 ‘창업하기 좋고’, ‘조금 덜 벌어도 같이 잘 사는’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동네를 만들어보자’며 ‘안녕, 축제’를 기획했다. 청년들을 모아 축제를 기획하고, 어궁동 거리에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 즐길 거리를 준비했다. 마을 상인들도 먹거리 장터와 플리마켓 등에 함께했다. 축제는 청년들과 마을 주민들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됐다.

비슷한 시기 윙윙은 ‘어궁동’으로 대전도시공사가 진행하는 도시재생 사업에 지원했다. 지역 주민 역량을 강화하고 동네 거점시설을 만드는 100억원 규모의 사업이었다. 동네에서 활동하는 이해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 ‘어궁동’이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윙윙은 주민과 행정기관, 전문가 사이에서 일을 원활하게 조율하는 코디네이터 구실을 했다. 주민 역량 강화 프로그램도 기획해 운영하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줌바댄스, 생활영어 교실도 열었다. 주민들은 수업이 끝나면 모여 밥을 해 먹으며 더 친밀해졌다. 도시재생사업으로 동네에 생기는 거점시설을 운영할 사람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민들은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도시재생 사업이 마무리되고 2021년 유성구청 뒤편에 동네 거점시설인 ‘안녕, 센터’가 들어섰다. 가로 경관도 몰라보게 바뀌었다. 어궁동 거리에 전봇대를 없애고 전선을 지중화한 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청년들과 주민들의 관계였다. 도시재생 과정을 거치며 청년들에 대한 주민들의 경계심이 많이 무너졌고, 주민들에 대한 청년들의 믿음과 애정도 커졌다. 청년 주도로 열었던 ‘안녕, 축제’도 점점 주민들과 같이 기획하게 됐고, 지난해에는 온전히 마을 주민들의 주도로 축제를 준비했다. 윙윙과 마을조합은 지난해 동네 사람들끼리 재능기부 활성화를 위한 ‘서로 돌봄’ 온라인 플랫폼도 함께 만들었다.

“지난해 서로 돌봄 플랫폼을 만들면서 설문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청년층도 가장 힘든 점으로 ‘외로움’을 꼽았더라고요. 젊은이들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구나, 함께하고 싶어하는구나 깨달았죠. 외로운 청년이든, 무모한 도전을 꿈꾸는 청년이든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어른들이 있는 마을이면 좋겠어요. 그들이 상처받고 떠나는 마을이 아니라요.” 어궁동에서 8년째 한식집을 운영하는 김효임 안녕마을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의 말이다.

김효임 안녕마을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최예린 기자
김효임 안녕마을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최예린 기자

지난 3월 열린 ‘해커톤 엠엘비’ 대회 참가자들이 어궁동 가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우은지 제공
지난 3월 열린 ‘해커톤 엠엘비’ 대회 참가자들이 어궁동 가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우은지 제공

윙윙이 동네자산화 프로젝트로 매입한 건물 모습. 윙윙 제공
윙윙이 동네자산화 프로젝트로 매입한 건물 모습. 윙윙 제공

B.Street 프로젝트

도시재생 사업 이후 어궁동에는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의 악몽은 어궁동도 비켜가지 않았다. 동네 환경이 좋아지자, 재건축으로 쫓겨나는 상인들이 생겨난 것이다. 윙윙은 ‘어떻게 하면 동네의 공간들을 확보하고 사람들이 모여 더 재밌게 놀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동시에 ‘비스트리트(B.Street) 동네자산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동네자산화는 매입, 장기임대, 공공위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동산을 확보해 동네에서 장기적으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그렇게 하면 원주민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에도 미리 대응하고, 창업하려는 청년들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을 통해 투자자를 모아 건물을 매입했다. 매입한 건물을 주식으로 쪼개 공동 소유하는 방식이다. 1년 동안 매일 수차례 투자자들을 만나 설득한 끝에 지난해 12월 200명이 평균 300만원씩 6억원을 투자했다. 평균 30만원씩 투자한 사람도 800명에 이른다. 1억원을 투자한 윙윙이 9억1천만원짜리 4층 건물의 최대주주로서 나머지 투자자들과 월세를 나눠 갖게 된다.

어궁동에 있는 한 청년 창업 공간. 최예린 기자
어궁동에 있는 한 청년 창업 공간. 최예린 기자

그렇게 윙윙은 장기임대를 포함해 9개 건물의 21개 공간을 확보했다. 현재 어궁동에는 20개 창업팀이 정착해 있다. 윙윙은 순차적인 동네자산화를 통해 동네에 청년창업가주택과 문화시설도 만들 계획이다. 50개 건물의 200개 공간을 확보해 1500명의 청년이 어궁동에 새롭게 정착할 수 있게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청년과 주민들이 윙윙이 확보한 공간을 좀 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공간공유 시스템’도 도입할 예정이다.

이태호 대표는 ‘벌집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작당과 도시재생을 거친 사회적 자본’이 윙윙과 어궁동의 자산이라 믿는다. “어궁동이 창의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으로서 청년들을 믿어주고 지원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대전을 넘어 우리나라에 그런 ‘어궁동’이 많아지길 상상하면서요.”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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