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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귀촌이 만든 청년모임 ‘오롯’…놀고, 사귀고, 공동육아 꿈꾼다

등록 2023-12-19 08:00수정 2023-12-19 09:03

충북 괴산의 청년모임 ‘오롯’의 회원들. 오롯 제공
충북 괴산의 청년모임 ‘오롯’의 회원들. 오롯 제공

충북 괴산에서 앵무새를 기르는 성기욱(35)씨의 하루는 새벽 6시에 시작한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농장으로 가 밤사이 앵무새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밥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앵무새 브리더(전문적으로 동물을 키워 분양하는 사람)이다. 앵무새를 키울 목적으로 괴산으로 귀농한 건 지난해 1월이다. 정부의 창업농 대출 지원을 받아 땅을 사고 396㎡(약 120평) 온실을 지었다. 전국의 앵무새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묻고 공부해 직접 설계한 농장이다. 지금은 앵무새 21마리를 키우며 짝짓기를 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직 번식 전이라 수입은 없지만, 정부의 창업농 지원과 짬짬이 하는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다.

지난해 충북 괴산으로 귀농한 성기욱씨가 지난 4일 자신의 농장에서 앵무새들에게 밥을 주고 있다. 최예린 기자
지난해 충북 괴산으로 귀농한 성기욱씨가 지난 4일 자신의 농장에서 앵무새들에게 밥을 주고 있다. 최예린 기자

서울 살 때 기욱씨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영화 연출부에 있다가 제작도 하고, 마지막엔 미술 일도 맡았다. 고된 일에 치여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언젠가부턴 늘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화가 났다.

“영화감독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니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고요. 꿈을 이뤄도 결국 행복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죠. 언젠가 행복할 미래를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매일매일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졌어요.”

그때 어릴 때부터 키워온 앵무새가 눈에 들어왔다. 지쳐서 집에 들어가도 앵무새를 보면 위로가 되곤 했다. 이 친구(앵무새)들과 함께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찾아보자는 것이 귀농의 발단이었다. 기욱씨 능력으로 서울에서 앵무새를 잘 키울 수 있는 공간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욱씨는 홀로 괴산으로 왔다.

괴산에 온 기욱씨는 사리면 대촌마을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15만원의 독채다. 집 마당에 텃밭을 만들 공간이 있고 반려 앵무새 2마리와 함께 살기에 좋다며 기욱씨는 웃었다.

‘오롯’과 함께하는 괴산의 삶

지난 4일 기욱씨는 앵무새 저녁을 챙기고 집을 돌아와 외출 준비를 했다. 대촌마을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괴산읍으로 가는 길은 늘 설렜다. 읍내에는 여자친구인 새미(25)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오롯’으로 향했다. 오롯은 괴산의 귀농·귀촌 청년들의 정착을 돕고 문화 모임과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는 청년 모임이다. 이날은 오롯에서 영화 소모임이 열리는 날이다.

기욱씨는 “낯선 농촌 생활에 빨리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오롯 덕분”이라고 했다. 새미씨도 오롯에서 만났다. 농촌에 내려오며 ‘연애와 결혼은 포기해야 하나’ 내심 걱정이었지만, 오히려 괴산에 와 사랑을 찾은 것이다. 기욱씨뿐 아니라 많은 괴산 청년들에게 오롯은 사랑방이자 쉼터, 놀이터가 되어주고 있다.

오롯의 청년들은 이곳을 ‘농촌에서 살려고 마음먹은 청년들의 비빌 언덕’, ‘괴산에 사는 청년들의 대안적인 삶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 ‘나를 사랑하고 서로의 삶을 긍정하며 좋은 동료이자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라 소개한다. 괴산에 사는 즐거움을 스스로 찾자는 것이 오롯의 목표다. 월요일 영화, 화요일 볼링 등 요일별 소모임뿐 아니라 지역 활성화를 위한 프로젝트도 기획한다. 지난 10월에는 우리 동네 창작마켓인 ‘마주보장’을 주관해 열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괴산에서 찾은 평화와 행복

‘오롯’ 영화 모임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그날 함께 본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묻는 영화를 보며 훌쩍이는 회원도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둘러앉아 각자의 소감을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밝았다. 1시간 넘게 영화 리뷰가 이어진 뒤 영화 모임을 주도하는 임희선(34)씨가 올해 마지막 모임 계획을 제안했다. 매년 그해 오롯에서 본 영화 중에서 골라 상을 주는데, 누군가 “영화 등장인물 코스프레를 하고 모여 시상식을 하자”고 말하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4일 충북 괴산의 청년창작소 ‘오롯’에 모인 회원들이 이날 본 영화 ‘어느 가족’에 대한 감상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지난 4일 충북 괴산의 청년창작소 ‘오롯’에 모인 회원들이 이날 본 영화 ‘어느 가족’에 대한 감상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영화 모임의 희선씨는 괴산에서 1인 출판사를 한다. 그가 괴산에 온 건 2019년이다. 광고를 전공하고 서울에서 영화마케터로 일했던 희선씨는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 유학까지 떠났었다. 독일 생활 2년 만에 몸이 안 좋아져 한국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괴산에서 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 귀촌한 부모님을 따라 ‘1년만 있어보자’며 찾은 괴산이었다.

“생각보다 시골 생활이 저한테 맞았어요. 괴산 집에 있으면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라고요.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졌고, 건강도 점점 호전되는 걸 경험하면서 ‘여기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괴산에서 책 만드는 일을 시작하고 학교 강의를 나가며 고정 수입도 생기면서 희선씨는 자연스럽게 괴산에 눌러앉게 됐다.

오롯 대표를 맡은 홍남화(33)씨도 고향은 서울이다. 서울 토박이인 남화씨가 괴산을 오가기 시작한 건 2015년부터다. 201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영상디자인 전공을 살려 서울에 있는 홍보영상 제작업체에 취직해 일했다. 콘서트 공연 영상에 자막을 넣는 일을 주로 했는데, 종일 사무실에 앉아 편집만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1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부모님이 계시는 괴산을 자주 찾았다. 남화씨의 부모님은 2011년 괴산으로 먼저 귀촌한 상태였다.

처음엔 본가에 놀러 가는 느낌으로 괴산에 갔다. 괴산에서 3일, 서울에서 4일 지내는 식이었다. 남화씨는 서울살이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괴산 집 계단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가만히 햇볕만 쬐고 있는데도 행복했어요.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서울은 나에겐 너무 자극적인 곳이구나. 그동안 많이 피곤했구나’ 알게 됐죠.”

괴산이 좋아지면서, 지역 사람들과 교류도 시작했다. 괴산 지역 문화예술단체인 ‘문화학교 숲’의 ‘밥상 모임’을 통해 사람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알음알음 일거리도 들어왔다. 디자인·영상편집 일뿐 아니라 시골 학교 방과후수업도 맡게 됐는데, 서울보다 수입이 좋았다. 서울에선 흔한 디자이너가 괴산에선 귀했기 때문이다. 굳이 서울에 살 이유가 점점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남화씨는 괴산에 자리잡아갔다.

왼쪽부터 임희선, 홍남화, 성기욱씨. 최예린 기자
왼쪽부터 임희선, 홍남화, 성기욱씨. 최예린 기자

‘밥상 모임’에서 희선씨를 비롯한 또래 청년들도 사귀게 됐다. 청년들이 모일 공간에 대한 아쉬움이 커질 무렵 삼선배움과나눔재단의 ‘지역 거점공간 조성 지원사업’ 소식을 들었고, 작당모의가 시작됐다. 2021년 여름께 일이었다. 일사천리로 준비해 사업 신청을 했고, 공간 인테리어 비용 1천만원을 지원받게 됐다. 청년 10명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괴산읍에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65만원짜리 공간을 마련했다. 99㎡의 공간에 손수 바닥 장판을 깔고 벽 페인트칠을 했다. ‘괴산 청년을 위한 온전한 공간’이란 뜻으로 ‘오롯’이라 이름 붙이고 2021년 말 문을 열었다.

처음 10명이던 오롯의 회원은 지금 47명으로 늘었다. 남화씨와 희선씨의 남편들도 귀촌·귀농해 오롯의 구성원이 됐다. 임신 5개월째인 남화씨가 웃는 얼굴로 배를 만지며 말했다.

“지난해 ‘1호 오롯 베이비’가 태어났고요, 이 친구가 나오면 ‘2호’예요. 오롯에 커플이 많으니 나중이 한마을에 모여 ‘공동육아’를 해보자는 이야기도 해요. 아직 꿈같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함께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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