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른 채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신 아비의 유골 찾아 가시덤불 우거진 골령골 골짜기마다 헤매는 저 흰머리 날리는 고아들을 보라.”
한국전쟁 때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고 전재흥(당시 25살)씨의 딸 미경(72)씨의 시다. 전숙자 시인으로도 알려진 딸은 대전 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장을 맡고 있다.
“당시 24개월밖에 안 된 아이였으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하지만 70평생 따라다닌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연좌는 한으로 남았어요. 이제 그 한을 풀고 싶어요.”
전씨는 오는 27일 오후 대전 산내에서 열릴 산내 학살 사건 합동 위령제 때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다.
<골령골의 기억전쟁>. 표지는 박건웅 화백이 그렸다.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담은 책 <골령골의 기억전쟁>(도서출판 고두미)이다. 박만순(54)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가 썼다. 그는 2002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좇고 있다. 2018년엔 충북지역 마을 2000곳에서 6000여명을 만나 채록한 충북지역 민간인 학살 보고서 <기억전쟁>을 냈고, 충북을 넘어 이웃 대전 등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기록도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다.
“골령골은 대전형무소 수용자들을 대량 학살한 곳이죠. 한국전쟁 직전 대전형무소는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전국 주요 정치·사상범 집결지였어요.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희생자 유족들의 전쟁 같은 기억을 끄집어냈어요.”
그는 대전뿐 아니라 제주, 전남 등 전국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유가족을 찾아 이야기를 끌어냈다. 유족과 주변 사람들의 전언을 토대로 학살 사건을 재구성한 책은 대담하고 솔직하다. 학살을 주도한 군·경 책임자 등 몇몇을 빼곤 대부분 실명이다.
책은 골령골 학살을 주도한 인물로 심용현 전 성신여대 이사장을 적시했다. 골령골 학살 사건이 일어난 1950년 6~7월 사이 심용현이 대전 2사단 헌병대 중위로 재직한 자력서(이력서)를 공개했다. 박 대표는 “산내 학살 사건을 추적하다 심용현의 자력서를 발굴하고, 당시 특경대 부대장으로 학살에 참여했던 이준영 등의 증언 등을 통해 심용현이 산내 학살현장의 총감독이라는 확신을 했다. 역사적 단죄와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저자는 골령골에서 희생된 대전형무소 재소자, 국민보도연맹원,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었다. 소설 <만다라> 김성동 작가의 아버지 김봉한·한희전 부부의 희생,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죽음, 영화 <지슬> 주인공 이경준의 가족사도 있다.
박 대표는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한국전쟁 앞뒤로 이뤄진 민간인 학살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아픔이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 역사다.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