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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말대로 돈 갚고 등기까지 받았는데”…태백 화전마을 ‘시름’

등록 2021-11-09 04:59수정 2021-11-09 12:26

50여년 전 민간업체 광전광업소 과실로 수해
광업소 땅에 삼척군 건축비 융자로 마을 형성
2000년 광업소 문 닫으며 마을 토지 매각
2018년 땅 주인이 주민들에게 소송 제기

주민들 “정부·지자체가 하라는대로 했는데”
“돈들여 정든 집 철거해주고 나올 판” 울분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재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태백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재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태백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평생 살아온 집에서 쫓겨나 거리로 나앉게 생겼습니다. 가진 건 집 한채밖에 없는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화전마을에 사는 이재석(72) 할아버지는 요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 일쑤다. 탄광에서 30여년 일하며 얻은 진폐증으로 고생하는데다 ‘집 걱정’까지 겹쳐 밤잠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은 지 50년 가까이 돼 벽지와 장판, 싱크대, 창틀 등 어느 것 하나 성한 곳이 없지만 이씨에겐 42㎡(13평) 남짓한 이 집이 전부다.

이 마을에 사는 45가구 70여명 주민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갑자기 나타난 땅주인이 집 철거하고 땅을 비워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담배꽁초 줍는 노인일자리 등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처지에 집까지 잃게 되면 죽으라는 말과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태백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태백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50여년 전 탄광 잘못으로 물난리

화전마을은 강원랜드가 있는 정선군 사북읍에서 태백시에 들어서면 만나는 첫 마을로 예전부터 ‘이재민 사택촌’으로 불렸다. 1972년 집중호우로 민영 탄광업체인 광전광업소의 탄광 갱내수가 대량 유출되면서 수해를 당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주민들을 집단이주시키며 마을이 조성됐다. 수해 책임이 있던 광전광업소는 땅을 제공했고, 태백시(당시 삼척군)는 건축비를 저리로 융자해줬다.

문제는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조처 이후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광전광업소가 2000년께 문을 닫으며 시작됐다. 마을이 조성된 토지도 경매를 통해 매각되면서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다 2018년 7월 땅주인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건물철거 및 토지인도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문제가 본격화됐다.

화전마을로 시집와 평생을 살아왔다는 황미정(65)씨는 “‘원래 광업소 땅이었는데 수해가 나서 우리에게 줬다. 그냥 살면 된다’는 시아버지의 말만 믿고 살아왔다. 그러데 어느 날 갑자기 땅주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집까지 철거하고 나가라고 하고 있다”며 울먹였다.

건축허가 받아 등기 있는데 내 집 아냐?

소송에서 주민들은 ‘1972년부터 20년 이상 해당 건물을 소유하면서 점유·사용해왔기에 땅에 대한 지상권(해당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을 시효 취득했다’는 논리로 맞섰다. 하지만 현재 소유자는 2010년께 땅을 매입해 20년 기간을 채우지 못한 상황이었고, 춘천지법 영월지원 민사1단독 강명중 판사는 지난 6월 땅주인 손을 들어줬다. 집을 빼고 나가란 얘기였다.

3년 가까운 소송 끝에 법적으로 남의 땅에 무단으로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주민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특히 상당수 건물은 태백시에서 건축허가를 받아 건물등기까지 낸 합법적인 건물이라 주민들의 충격이 더했다.

황미정씨는 “집 지으면서 빌린 돈은 읍사무소에 찾아가 갚았다. 돈을 다 갚으니 공무원이 등기 내라고 해서 등기까지 냈다. (정부와 지자체가) 하라는 대로 다 했고, 그 시절 우리가 못 배우고, 세상 물정 어두워 그냥 그러면 다 된 거로 알았다. 지상권 등기를 내야 한다는 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강제로 집을 철거해도 무너진 집터에 텐트 하나 치고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당시 지자체의 허술한 일처리를 원망한다. 우성국(47)씨는 “수해를 입은 주민들은 당시 지자체가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당시 지자체가 똑바로 대책을 마련했으면 이렇게 주민들이 쫓겨날 처지에 놓일 일도 없었다. 돈까지 들여 정든 집을 철거해주고 나와야 할 판이다. 집과 땅까지 뺏기면 어르신 몇분은 화를 이기지 못해 쓰러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재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주민 제공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재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주민 제공

탄광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

법원 판결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상황은 언제 급박하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주민들 사이에는 ‘어찌 됐건 항소했으니 시간을 좀 더 번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도 있지만, 철거 소송에서 원고가 1심에서 이겼다면 항소심 중에도 강제철거 집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강훈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는 “(주민들이) 1심에서 졌다면 항소심 도중에도 철거 집행에 들어갈 수 있다. 토지 소유자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셈”이라며 “수급 가구, 차상위 계층에 대한 전세임대 방안 마련과 집 철거로 수급 가구, 차상위 계층이 될 가구 현황을 확인한 후 이들에 대한 주거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화전마을 45가구(70여명) 주민 가운데 65살 미만 주민은 단 2명뿐이다. 특히 4가구 가운데 1가구는 기초생활보장 수급 가구와 차상위 가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홍성용 ㈔원주주거복지센터 센터장은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장애인과 저소득 계층이 모여 사는데 이곳이 한꺼번에 철거되면 이주할 곳이 없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집이라도 가지고 있던 주민도 집이 철거되면 부동산 재산 가치가 ‘0’이 되기 때문에 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재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태백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재민 사택촌’ 화전마을의 모습. 태백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제공

50년 방치한 지자체가 나서야

주민들은 1970~1980년대 탄광 사택촌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화전마을을 태백시가 보존 차원에서 매입한 뒤 재임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주민 쪽 변호인인 류재율 변호사(법무법인 중심)는 “재판 중 원고 쪽(땅 소유주)에서 3.3㎡당 100만원에 한꺼번에 팔린다면 매각 의사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태백시가 나서면 가격 협상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땅 소유주는 당시 이 땅을 3.3㎡당 30만원가량에 샀고, 현재 공시지가는 25만원 수준이다. 화전마을 넓이는 5266㎡(1592평)로, 땅 소유주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최대 16억원가량이 필요한 셈이다.

태백이 지역구인 이상호 강원도의원은 “일단 태백시가 나서야, 땅 매입에 필요한 도비·국비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태백시 공무원을 만나보면 서로 자기 업무가 아니라며 떠넘기느라 바쁘다. 법에 무지해서 당한 주민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인데, 너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류재율 변호사는 “사태의 책임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을 위한 대책을 허술하게 마련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태백시(당시 삼척군)에 상당 부분 있다. 탄광업체야 개인기업이니 그렇다 쳐도, 지자체는 주민들에게 집까지 짓도록 했으면 토지를 사용할 권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상권 등기 설정 등 조처를 했어야 했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50년을 방치해 지금과 같은 사태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태백시 관계자는 “일단 개인 간의 소유권 분쟁에 대해 행정이 개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시에서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주거대책 마련이 제일 중요한 만큼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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