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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살린 ‘국내 최고령’ 단관극장, 시장 바뀌자 철거 위기

등록 2023-03-30 11:30수정 2023-03-30 11:46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외부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외부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원주의 보물인 아카데미극장을 지켜주십시오.”

지난 22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옛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김혜선(18)양이 큰소리로 외쳤다. 김양은 “가끔 열린 상영회를 통해 아카데미극장의 매력을, 또 옛 극장을 계기로 청소년과 어른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청소년과 어른 모두가 만나 소통하는 공간으로 극장이 새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극장 앞에서는 김양뿐 아니라 아카데미극장의 보존과 재생을 원하는 시민모임인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모여 ‘인간 띠 잇기 챌린지’를 했다. 서로 손을 맞잡고 극장을 둘러싼 행동으로 극장을 보존하려는 시민들의 의지를 원주시에 보여주자는 취지다. 어릴 적 단관극장에 얽힌 추억을 간직한 황승룡(75)씨도 “옛것이라고 헌신짝처럼 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극장을 헐어버릴 생각을 접고 원주의 랜드마크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에서 살다가 직장 때문에 원주로 이사를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익명의 40대 여성은 “서울에도 단성사와 피카디리, 서울극장 등 많은 극장이 있었는데 다 사라졌다. 옛 극장에는 학창 시절 추억과 풋풋했던 연애의 기억 등 많은 것이 녹아 있다. 그냥 극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시민들이 극장 보존을 요구하며 ‘인간 띠 잇기 챌린지’를 하는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시민들이 극장 보존을 요구하며 ‘인간 띠 잇기 챌린지’를 하는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 철거 위기 아카데미, 시민소통 공간으로

아카데미극장은 1963년 문을 연 단관극장이다. 단관극장은 멀티플렉스와 달리 스크린이 하나인 옛날식 영화관을 말한다. 아카데미극장뿐 아니라 원주에는 원주극장과 시공관, 문화극장, 군인극장 등 5개의 단관극장이 성업했다. 40년 넘게 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극장들은 2005년 원주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상륙하자 다음해인 2006년부터 문을 닫기 시작했다. 원주극장과 시공관이 가장 먼저 헐린 데 이어, 800석 규모로 가장 컸던 문화극장마저 2015년 철거되면서 아카데미극장이 유일하게 남은 단관극장 건물이 됐다.

하지만 곧 아카데미극장도 철거 위기를 맞았고, 이를 안타까워하던 시민들이 중심이 돼 극장 보존을 위한 모금과 성명 발표, 문화활동 등을 시작했다. 시민들이 아카데미극장 보존을 원하는 것은 단지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아카데미극장이 ‘옛 극장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카데미극장 건물은 단관극장의 외형을 유지한 채 영사기와 스크린, 관람석, 매표소 등 내부 시설과 설비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언제라도 극장 기능을 다시 수행할 수 있다.

근대 건축 전문가인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지난해 7월 원주시에 보낸 자문의견서에서 “아카데미극장은 원주시 근대 건축을 대표할 뿐 아니라, 1960년대 한국 극장건축의 모더니즘 미학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위경혜 전남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도 “지역 극장은 대중문화의 전파 장소이자 도시 원주의 생성과 변화의 역사를 알리는 산증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극장을 보존해달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6년 가까이 이어지자 미온적이던 원주시도 2021년 “원주시가 아카데미를 사들인 뒤 시민 소통공간으로 꾸며 극장 역할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태도를 바꿨다. 실제 원주시는 지난해 1월 시비 32억원을 들여 극장 건물과 토지까지 사들였다.

오현택 ‘아카데미의 친구들’ 공동수호대장은 “시민 스스로 지역의 문화자산을 발굴하고 보존활동을 지속한 결과 2021년 문화유산 국민신탁·한국내셔널트러스트 주최 ‘이곳만은 지키자’ 캠페인에서 ‘문화재청장상’까지 수상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민관 거버넌스의 좋은 예를 시민과 원주시가 만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 안에서 지난해 시민들이 모여 상영회를 진행하는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 안에서 지난해 시민들이 모여 상영회를 진행하는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 32억원 들여 샀는데…시장 바뀌니 ‘재검토’

하지만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원강수 시장이 당선된 이후 원주시의 태도가 급변했다. 원 시장 인수위원회는 “복원 사업은 시민들에게 공감대가 크게 형성돼 있지 않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재정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한다. 역사·문화적 가치도 미비하며, 안정성 문제와 기대 이하의 활용도가 예상되는 등 복원 필요성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하면서 “아카데미극장 복원을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후 원주시는 아카데미극장 복원을 ‘재검토’ 사업으로 분류했다. 이미 투입한 매입 비용 32억원 이외에도 극장 리모델링과 전시·커뮤니티 공간 조성 등에 60억원을 추가 투입해야 하고, 연간 운영비 등 재정 부담이 크다는 것이 이유다.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내부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내부 모습.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제공

원주시가 극장 보존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시민들은 지난 7일 원주시에 ‘시정정책 토론’을 청구하는 등 공개적인 대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원주시가 청구서 보완을 요청하면서 양쪽의 갈등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주성 ‘아카데미의 친구들’ 공동수호대장은 “원주시가 법적 근거도 없는 청구인들의 등록기준지 주소(본적 주소)까지 요구하며 보완 요청을 했다. 시청 공무원들이 밀실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 포럼과 시민 공청회, 쌍방 토론 등 공론화 과정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것이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천종 원주시 향토문화팀장은 “조례상 선거권 있는 200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하지만, 제출된 자료로는 선거권 유무를 확인할 수 없어 개정 정보를 추가로 요청했다”며 “최적의 방안을 찾기 위해 관련 전문가와 시민, 상인회 등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아카데미극장 활용 방안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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