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의 신림면 할머니들이 옛 황둔초등학교 창평분교를 새단장한 할매발전소에서 예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로컬리티: 제공
“학교도 못 다녔으니 당연히 그림도 못 그려봤지. 붓도 처음 잡아봐. 이런 걸 언제 해봤겠어. 너무너무 신나.”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에 사는 서월이(83)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18살에 결혼해 평생을 신림면에서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들의 숲’이라고 불리는 ‘신림’은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원주에서도 대표적인 산골 오지로 불린다. 서월이씨에겐 평생의 한이 있다. 가난과 싸우느라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요즘 서씨와 인근 마을의 할머니 16명은 지난 5월부터 옛 황둔초등학교 창평분교로 등교하고 있다. 학교에 가면 교사로 변신한 젊은 예술가 34명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을 한다. 서월이씨는 “팔순이 넘는 나이에 뒤늦게 붓을 들다 보니 마음처럼 되진 않지만, 잘해보고 싶은 마음만은 젊은이 못지않다. 할매발전소가 우리 동네의 보물”이라며 활짝 웃었다.
학생들이 모두 떠난 시골의 폐교가 할머니들의 예술 창작공간인 ‘할매발전소’로 되살아났다. 지역 기반 문화 콘텐츠를 제작해온 문화예술단체인 ‘로컬리티:’는 지난해 9월 폐교로 오래 방치돼온 황둔초등학교 창평분교를 문화예술공간으로 꾸며 노인들을 상대로 다양한 예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단체의 심지혜 학예사는 “할머니들은 오랜 삶 속에서 얻은 단단하고 깊은 지혜와 생의 에너지를 다양한 예술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할머니가 직접 예술창작의 주인공으로 변신해 다양한 색채와 떨림이 담긴 선으로 마음을 표현해내는 과정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원주의 신림면 할머니들이 옛 황둔초등학교 창평분교를 새단장한 할매발전소에서 기획전시회를 열었다. 로컬리티: 제공
지난 4일부터 9일까지는 졸업 전시회 격인 기획전 ‘사라지는 살아지는―삶의 궤적 속에 뒤돌아보면 언제나 있었던’도 열었다. 이 전시회에선 80살 나이에 독학으로 동양화를 시작했다가 눈이 침침해져 2년 전에 붓을 내려놓은 최향락(88)씨도 다시 용기를 냈다. 동양화만 그려온 최씨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처음으로 추상화에 도전했다. 이혜윤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감각과 인지의 시간차’ 시리즈를 완성했다.
“감자 캐고, 옥수수 따고, 고추 따고, 콩도 따고. 일이 끝이 없어.” 한평생 고된 밭일만 하고 살아온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는 어둑한 학교 건물을 수놓는 ‘미디어아트 쇼’로 변신했다. 69살 엄마가 기억하는 103살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모-모’도 눈길을 끌었다. 누군가의 딸이자, 어머니, 이제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된 전옥분씨의 삶을 계절과 함께 기록한 작품이다.
김영채 ‘로컬리티:’ 대표는 “할매발전소는 지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이 예술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 전환에서 시작했다. 노인 세대가 지역의 ‘해결 과제’가 아닌 ‘예술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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