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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조 윤선도 ‘동시’ 100수 번역해 60대 중반에 박사 됐죠”

등록 2022-02-08 18:45수정 2022-02-09 02:31

[짬] 고산 윤선도 손부 임귀남씨

고산 윤선도의 동시 100수를 번역해 박사 학위를 받는 임귀남씨. 임귀남씨 제공
고산 윤선도의 동시 100수를 번역해 박사 학위를 받는 임귀남씨. 임귀남씨 제공

고산 윤선도(1587~1671)의 9대 손부가 500년 전 선조 할아버지의 동시(東詩) 100수를 번역해 박사 학위를 받는다.

전남대는 8일 윤선도의 직계 9대 손부인 임귀남(65)씨에게 이달 말 논문 ‘고산 윤선도의 동시집 ‘사고(私稿)’ 선역’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윤선도의 초시 급제작 ‘전당의 봄 조망’(錢塘春望), 진사시 급제작 ‘눈을 무릅쓰고 고산을 방문하다’(冒雪訪孤山) 등 동시 100수의 원문과 번역이 실렸다. 출전을 밝힌 주석과 작품을 조망한 해제도 달았다. 심사 때는 “시가문학의 대가 윤선도가 남긴 동시 194수 중 100수를 엄선해 자세한 주석과 현대어 번역을 단 한국 최초의 작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감을 묻자 임씨는 “수백년 동안 진흙 속에 묻혔던 보물을 찾아 반짝반짝 닦아낸 듯한 느낌”이라며 “알면 알수록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깊은 공부는 이제 시작이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익히겠다”고 했다.

과거시험 때 주어진 제목에 따라 지었던 7언 한시인 동시는 과체시(科體詩)로도 불렸다. 중국사람이 지은 한시에 상대해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한시라는 의미를 가진 동시는 애초 과거 응시용으로 지어졌으나, 차츰 급제 이후에도 시작을 멈추지 않아야 할 선비의 교양으로 올라섰다. 경전이나 역사의 명구, 전기나 전설의 고사 등에 나오는 인물의 발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았다. 중국과 달리 18운 36구 252자인 고유의 시형으로 자리 잡으면서 ‘동국의 시가’로 불리게 됐다. 윤선도는 한시 600여수를 남겼는데, 이 가운데 194수가 동시로 분류된다.

임씨는 20대 후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서예에 입문했다. 30대 초반에는 쓰는 글자의 내용을 알고 싶어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88년 광주향교에서 <사자소학>으로 시작해 <사서삼경> <고문진보>를 거쳐 <당송팔대가 문초> <장자> <노자> <회남자> 등 고전을 두루 섭렵했다. 공부가 깊어지면서 한시를 짓는 데 관심을 둔 그는 50대 후반인 2016년 전남대학원 한문고전번역 협동과정의 문을 두드렸다. 학위논문을 준비하며 해남 윤씨 고택 녹우당에서 2001년 발견된 9대 선조 윤선도의 동시집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동시집 ‘사고’ 100수 번역해
이달 전남대에서 박사 학위
동시 ‘한국사람 지은 한시’ 뜻
서예 시작해 뒤늦게 한학 공부

“선조 정신세계 알고자 번역 나서
2~3년 내 나머지 94수도 옮길 터”

“선조의 정신세계를 깊이 알고 싶어 번역에 도전했다. 하지만 필사본의 초서를 푸는 것부터 막혔다. (초서를 읽기 쉬운 해서로 바꿔 쓰는) 탈초 뒤에도 출전 등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발도 나아갈 수 없어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한동안 필사본의 복사물을 들고 쩔쩔매던 그한테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전달한 원본 필름이 활로를 열어주었다. 초서에 밝은 한학자 안동교 선생은 수수께끼 같은 글자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고, 한문 고전을 연구 중인 국문과·중문과 교수들은 주석과 번역을 꼼꼼히 살펴 조언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논문은 번역보다는 각주와 주석의 분량이 훨씬 많아졌다.

“처음부터 한자도 빠뜨리지 말고 직역해야 한다고 배웠다. 매끄럽게 의역하면 오류가 나기 쉽다고 했다. 초서를 풀고 중국어 사이트에서 출전을 확인하는 등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한 수 250자를 풀고 나면 한 달이 금세 지나곤 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왜 엄두를 내지 않았는지 뒤늦게 깨달았다”며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고, 어려웠던 만큼 막혔던 한자 한자, 한구 한구를 풀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되돌아봤다.

그의 여정은 서예에서 한학으로, 시작에서 번역을 거쳐 중국어로 40여년 동안 이어졌다. 그는 학위가 공부의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계획도 명확하다고 했다.

“동시 100수를 푸는 데 5년이 걸렸다. 나머지 94수를 2~3년 안에 완역해 한국의 동시가 갖는 문학사적 가치를 높이겠다. 해남 윤씨 문중에서도 완역 이후 문집을 간행한다고 들었다. 조선의 동시에 담긴 선조들의 높은 이상과 소망이 오늘을 성찰하는 귀감이 되기를 고대한다.”

그는 앞으로 광주 녹양고문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기대승의 문집을 번역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사업 등에 헌신할 예정이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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