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향토사학자 정규철씨가 18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4·19 기록집 <청춘의혈>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1960년 4월19일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광주 청년들의 기록집이 62년 만에 공개됐다. 재야 사학자들이 나서 재출간을 추진하는 한편 자치단체는 이 책 내용을 바탕으로 표지석을 세워 광주 정신을 후대에 알리기로 했다.
전남대 사학과를 나와 고교 역사교사를 지낸 향토사학자 정규철(80)씨가 18일 <한겨레>에 공개한 <청춘의혈>(靑春義血)을 보면 1960년 4·19혁명의 경과와 광주의 시위상황, 결과 등이 상세히 담겨 있다.
4·19 때 고교 2학년생으로 가두시위에 참여했던 정씨는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뒤 이 책이 나오자 구매해 보관하고 있었다. 60년도 더 지났지만 광주지역 4·19 연구가 부족하고 기념사업도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어 공유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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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김재희 기자 기록·사진
4월 시위 상황·희생자 명단 등 담겨
1960년 6월 출간…작년 5·18기록관 기탁
“지역 연구·기념사업 도움됐으면”
연구용 복사본 공유·재출간 추진
고교생 모의했던 하숙집 터에 표지석
1960년 6월 4·19 혁명 직후 광주 시위상황을 정리해 출간된 <청춘의혈>의 표지. 김용희 기자
32절지(13×18㎝) 크기에 총 10장 190여쪽 분량인 이 책은 4·19혁명 때 옛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의 고 김재희 기자가 취재 기록과 사진을 엮어 1960년 6월15일 출판한 기록물이다. 책 표지 위쪽에는 붉은 한문으로 큰제목 ‘청춘의혈’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고 바로 밑에는 부제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광주학생의거전모’가 적혀 있다. 그 밑으로는 ‘이승만 물러가라’ 문구와 함께 핏자국을 떠오르게 하는 붉은색 얼룩무늬도 그려 놓았다.
1장 ‘서울과 광주의 4·19 의거 화보’에서는 광주 시내로 뛰쳐나오는 고등학교 학생들, 금남로에서 옆 사람과 팔짱을 끼고 경찰에 맞서는 학생들,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때리는 경찰, 시위 학생들에게 물을 뿌리는 소방차 등 치열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7장 ‘광주의 4·19의거 전모’에는 1960년 4월19일 경찰의 총탄에 숨진 고준석·김재복·이귀봉·강정섭·박향(박순희)·장기수·김준호 열사의 이름과 부상자 명단이 실려 있다. 광주 4·19 희생자 중 박씨 이외 나머지 6명은 16∼19살 청소년이었다. 책 첫머리에는 ‘사월은 피로 덮인 잔인한 달인가’로 시작하는 박봉우 시인의 시 ‘젊은 화산’을 실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향토사 연구자들과 자치단체는 1980년 5·18민중항쟁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비해 광주지역 4·19 자료가 미흡한 상황에서 이 책이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서 국가보훈처는 이 책에 나온 시위 참여자 이름을 근거로 2007년 광주지역 4·19유공자 11명을 발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정씨로부터 책을 기탁받아 보관중인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문화재보존업체에 의뢰해 복사본을 제작, 연구자들과 공유할 계획이다. 일부 4·19 유공자들은 책을 재출간하기 위해 김 기자의 유족을 찾는 한편 저작권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또 광주 동구청은 책 내용을 바탕으로 4·19 시위를 모의했던 이홍길(80) 전남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하숙집 자리(광주 동구 계림동)에 표지석을 다음달까지 설치할 예정이다. 표지석 제작은 5·18민중항쟁추모탑을 만든 나상옥 작가가 맡았다.
광주4·19 기록집 <청춘의혈> 내용을 바탕으로 광주 첫 시위를 모의한 광고생 이홍길의 계림동 하숙집 터에 설치될 예정인 기념 표지석의 조감도. 나상옥 작가 제공
<청춘의혈>에는 1948년 4월18일 저녁 8시께 광주고 2학년생으로 학생대표였던 이 교수와 전만길(80) 조대부고 학생회장 등 학생 12명이 이 교수의 하숙집에 모여 시위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고 나온다. 1978년 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한 교육지표선언 11명으로 참여해 해직되기도 했던 이 명예교수는 4·19 60돌 때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1960년 2월 말 광주 충장로 골목길에 과격단체가 정치깡패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장면 선생(1899∼1966)을 친일파로 모함하는 전단(삐라)을 붙인 것을 알고 격분했다. 광주고 동창 3명과 백지에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은 학교를 간섭하지 말라’는 내용의 글을 적어 통금시간에 몰래 거리에 붙였다. 이어 광주 시내 5~6곳 고교 학생들과 연대해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준비하던 중 4월18일 동창생 13명과 자취집에서 ‘의거’를 논의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려고 하자 교장이 반장, 대의원 등 학생회 간부 50명을 교장실로 불러 모으고 문을 잠가버렸다. 하지만 학생회 간부들은 학교 종을 신호탄으로 교장실 창문을 깨고 탈출했고 1000여명이 모여 경찰이 지키던 교문을 부수고 시내로 나가 2, 3시간 동안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시민과 학생 동참’을 외쳤다.”
정씨는 “훗날 4월 시위 현장에서 숨진 희생자가 모두 21명으로 확인됐고, 1962년 전남도민들이 성금을 모아 광주 사직공원에 4·19 열사 추모비도 세웠지만 지금은 거의 찾는 이가 없을 정도로 잊혀진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병열 광주 4·19민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은 “<청춘의혈>은 광주시청이나 경찰 기록을 근거로 작성돼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름 없는 별’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