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옛 <전남일보>에 실린 전남 여수 귀환촌 철거 반대 시위 모습. 주종섭 전남도의원 제공
“넝마주이를 보내서 집을 부숴버린다고 하니, 화가 안 나겄소.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니까 우리는 고춧가루탄이랑 돌을 던졌제. 나는 어려서 사람들 뒤에 있었는디, 동네 형님이 죽고 사람들이 막 잡혀가고 난리가 아니었제.”
10일 전남 여수시 공화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판용(69)씨는 50여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일이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1969년 사건이 났을 때 그는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전남 여천군(1998년 여수시와 통합)에 살던 이씨 가족은 일제강점기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 터를 잡고 농사로 생계를 잇던 중 해방이 되자 모두 귀향했다. 조부모, 부모, 육남매 등 열다섯명이 넘는 식구였다.
이씨 가족처럼 해방 직후 일본 등에서 급히 귀국한 동포들은 살 곳이 마땅찮았다. 이들의 거주지 문제가 사회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귀환동포는 200만명에 이르렀다. 여수는 전체 인구(18만6291명)의 10%에 달하는 1만7천명이 귀환동포였다. 여수 건국준비위원회는 이들을 옛 여수역 앞 철도국 소유 땅에 정착시켰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귀환촌’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귀환촌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옛 철도·하역 노동자 숙소(구숙사·신숙사) 지구와 추가로 지은 임시건물구역인 ‘귀환정’으로 나뉘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임시건물 150여동에 300가구 1700여명이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씨 가족 등 일부는 철도국에 임대료를 내고 살았지만 임시 정착지였던 까닭에 상하수도·전기 등 필수 시설은 부족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는 마을 절반 이상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1969년 3월31일 찍은, 옛 여수역 인근 철로에 앉아 철거 반대 시위를 하는 귀환촌 주민 모습. 주종섭 전남도의원 제공
해방 후 귀환동포 생활사를 연구한 주종섭 전남도의원(사회학 박사)은 “귀환촌 주민은 귀환동포와 피난민 이외에 일자리를 찾아 전라선을 타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며 “막노동, 하역, 짐꾼뿐 아니라 증기기관차에서 떨어진 무연탄 가루로 마메탄(조개탄)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밝혔다.
힘겹게 살아가던 귀환촌 주민들에게 1969년 1월16일 순천철도국은 임시건물을 3월31일까지 철거하라고 통보했다. 박정희 정부의 철도 연변 무단건물 철거 지시에 따른 조처였다. 해방 뒤 20여년간 귀환촌에 살며 언젠간 땅을 불하받을 것으로 기대한 귀환동포들에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자진 철거 기한을 넘기면 넝마주이 50명을 동원해 강제 철거를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귀환촌 주민들은 여수시, 순천철도국 등에 이주 대책을 요구했으나 두 기관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시간만 보냈다.
3월31일 오후 귀환촌 주민대표 한만국(당시 28살 추정)씨가 여수역에서 3시간여 동안 철도국과 협상을 벌였지만 결렬됐다. 오후 4시께 주민 500여명은 철로를 따라 앉아 열차 진입을 막고 “대책 없이 갈 수 없소, 이주대책 세워주오”라고 외친 뒤 해가 지자 해산했다. 이튿날 시위는 비교적 평화로웠던 전날과 분위기가 달랐다. 김남권 당시 여수시장과 주민들이 대화를 이어가던 중 오후 6시께 전라남도경찰국 기동타격대가 도착했다. 모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둘렀고 주민들은 고춧가루와 시멘트, 흙 등을 뭉친 ‘고춧가루탄’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주진호(당시 31살)씨가 숨졌다. 경찰은 주씨가 주민이 던진 돌을 맞고 쓰러진 뒤 밟혀 숨진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주민들은 경찰이 때리는 모습을 봤다고 맞섰다. 이날 소요로 주민 20여명, 경찰 20여명이 다쳤다. 밤이 되자 시위는 자연스럽게 해산했는데 경찰은 밤새 주동자를 찾아 50여명을 연행했고 이 중 19명을 구속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일본 등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살던 전남 여수 귀환촌 자리 전경.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여수시와 철도국은 귀환정 주민들에게 이주비 5000원과 쌀·보리 등 곡식 2말, 벽돌 찍는 도구를 주며 국동 공동묘지, 오림동 산비탈, 중복동 등 3곳으로 분산시키고 집은 스스로 지으라고 했다. 당시 공장 노동자의 한달 평균 임금이 1만원이었다. 이씨는 “배정받은 국동 공동묘지 터에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보니 사람 뼈가 무더기로 나왔다”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냐며 어머니가 대성통곡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귀환정 자리에는 민간 수목원이 들어섰다. 구숙사·신숙사 터는 2000년대까지 남아 있다가 민간 수목원과 함께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장소로 편입돼 철거됐다. 현재 여수박람회장 앞에는 옛 여수역 알림판만 세워져 있을 뿐 귀환촌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전남 여수 옛 귀환촌 주민대표 이판용씨가 여수세계박람회장이 들어선 옛 귀환촌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이씨의 마지막 소원은 귀환촌 자리를 알리는 조그만 비석을 세우는 것이다. 주 의원의 주재로 지난달 31일 귀환촌 관련 토론회가 처음으로 열려 여수시의회 차원에서 역사 알리기에 나서기로 했다. 이씨는 “귀환촌 사람들은 열차를 타러 갈 때마다 옛 집터가 보이니까 소주 한잔 마시고 옛 추억에 빠져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며 “조그맣게라도 망향비를 세워 그들의 억울함을 달래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