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광주 서구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진행하던 들불야학 모습.5·18기록관 제공
“내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
1970년 11월 전태일이 산화하기 전 남긴 말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이 추상적인 민주화투쟁에서 현장운동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됐다. 1978년 7월 광주에도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이 생겼다. 들불야학은 광주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실태조사를 하는 등 노동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지만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이은 신군부의 집권으로 동력을 잃어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들불7열사(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와 5·18에 가려졌던 들불야학의 교육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처음 마련됐다.
5·18기록관은 5·18 43주년을 맞아 3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기획전 ‘들불의 기록, 생동의 공간으로’를 9일부터 8월4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는 들불야학의 교육 이념과 교육 목표를 중심으로 들불야학의 특성을 설명하고 5·18 때 대안언론의 역할을 조명한다.
전시는 들불야학이 처음 교실을 열었던 광천동 성당 내부를 재현하고 활동기록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사진, 기록물, 영상과 함께 특별제작 만화를 통해 들불야학의 교육체계를 알기 쉽게 알려준다. 고 김영철 열사가 광천시민아파트 주민들을 아침에 깨우기 위해 사용했던 종도 함께 전시한다.
광주광역시 동구 5·18기록관 3층 전시실에 재현한 옛 들불야학 교실.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들불야학은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 3학년이었던 박기순의 주도로 신영일, 임낙평 등 전남대 학생들과 서울에서 야학경험이 있던 전복길, 최기혁, 김영철이 합세하며 틀을 갖췄다. ‘들불’이라는 이름은 동학혁명을 다룬 유현종의 소설 <들불>과 <미국의 노동운동 비사>라는 책의 부제에서 따왔다.
고 조비오 신부의 협조로 1978년 7월23일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35명의 노동청소년과 8명의 강학이 모여 입학식을 열었고 윤상원 박관현이 합류하며 이듬해 1월 광천시민아파트로 교실을 옮겼다.
교육 목표는 ‘사랑이 밑받침하는 진정한 인간 교육의 실현’이었다. 학기당 6개월씩 3학기제로, 1학기 ‘사랑의 교육’, 2학기 ‘비판의 교육’, 3학기 ‘방향의 교육’으로 수업 방향을 잡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 8시∼밤 10시까지 수업했다.
들불야학 참여자들은 노동자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유를 모순적 사회구조로 꼽았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 주로 중학과정을 다뤘으나 문화, 생활지도, 세계노동운동사, 노동법 등 노동자들의 인간화, 의식화교육도 함께 하며 노동운동가를 양성했다.
1978년 들불야학에서 수업을 받던 학생들과 이들을 가르치던 강학이 대화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5·18기록관 제공
운영방식의 특징은 기존 교육방식의 틀을 깼다. 교사와 학생간 수직적 구조에서 벗어나 교사도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의미로 ‘강학’이라고 불렀고 학생 중에는 ‘학강’(배우면서 가르친다는 의미)도 있었다. 수업은 암기형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강학과 학생이 대화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법을 찾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광주공단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광천시민아파트 실태조사, 광주공단 실태조사로 드러난 노동자의 힘든 삶은 광주시민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1980년 5·18 땐 공동체적 운영방식을 바탕으로 조직적 참여가 가능했다. 들불야학 구성원들이 만든 투사회보 등 유인물과 호소문 등은 대안언론 역할을 했다. 전시장 한쪽에는 당시 들불야학이 사용했던 등사기도 전시해 유인물 제작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를 준비한 정희석 5·18기록관 학예사는 “들불야학 옛 사진을 보면 학생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많이 보여 배움과 문화에 목마른 시민들에게 사랑방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교육이념과 방식은 오늘날 적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 나갔다”고 말했다.
들불야학 강학과 학생들의 야유회 모습.5·18기록관 제공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