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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성지 이끈 ‘무등 정신’ 이젠 한국사회 품었으면”

등록 2023-06-15 19:13수정 2023-06-15 21:41

[짬] 한국 수묵화단 거목 김호석 작가

김호석 작가가 지난 10일 광주 동구와 시민자유대학 주최로 무등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무등인문포럼에서 기조발표를 했다. 무등현대미술관 옥상에 선 김 작가의 뒤로 무등산이 버티고 있다. 정대하 기자
김호석 작가가 지난 10일 광주 동구와 시민자유대학 주최로 무등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무등인문포럼에서 기조발표를 했다. 무등현대미술관 옥상에 선 김 작가의 뒤로 무등산이 버티고 있다. 정대하 기자

가장 먼저 눈에 안긴 작품은 <아파트>였다. 어둡고 찬 콘크리트 아파트에 황토색 불빛이 잔잔하게 스며 있어 온기가 느껴졌다. 전북 정읍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김호석(66) 화가는 친구들이 사용하다가 버린 한지 중 깨끗한 부분만 잘라 덧대 붙여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979년 홍익대 동양화과 3학년 때 그린 이 수묵담채화로 그는 중앙미술대전 장려상을 받고 화려하게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김명지 광주시립미술관 연구사는 13일 “<아파트>는 먹의 농담 효과가 매우 뛰어나 수묵화의 현대화 가능성을 보여준 수작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김호석 작가의 &lt;아파트&gt;(1979).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의 <아파트>(1979).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의 광주 첫 초대전이 광주시립미술관 5, 6전시실에서 8월13일까지 열린다. 이 전시는 ‘검은 먹 한 점’이라는 제목을 달고 6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김 작가는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부채 의식이 너무 많아서 광주에서 그림 전시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강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예술의 출발은 ‘점’이다. “점은 동서남북의 방향감과 입체적인 부피감과, 바깥으로 향하는 힘과 안으로 들어오는 힘이 같이 있도록 찍혀져야 돼요. 점으로부터 시작해 선과 면이 만들어지는 것이 예술의 시작이지요.” 김 화가는 자신을 스스로 “사람들이 통용적으로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아니다”라고 평한다. 대중적인 것과 조금 거리가 있다는 의미인셈이다. 하지만 “필묵이 무너지는 것만큼은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며 80년대 이후 ‘수묵운동’ 외길을 걷고 있다.

김호석 화가가 지난 5월 광주5·18기록관에서 열린 ‘이강, 이강은 이강이다’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김 작가는 이 전시회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큰 산으로 꼽히는 이강 선생의 삶과 정신을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정대하 기자
김호석 화가가 지난 5월 광주5·18기록관에서 열린 ‘이강, 이강은 이강이다’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김 작가는 이 전시회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큰 산으로 꼽히는 이강 선생의 삶과 정신을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정대하 기자

그는 ‘운동권 화가’는 아니지만, 역사적 사건의 굽이굽이를 꾸준히 기록해온 ‘사실주의 작가’다. 이번 전시회에 맞춰 새로 선보인 <표적>은 5·18때 군인들이 조준사격한 것을 고발한 그림이다. 엠16 탄착점을 잡기 위해 군인들이 사용하는 실제 영점 표적지에 트럭에 탄 시민군들을 그렸다. <모기는 동족을 먹지 않는다>는 그림은 “사람이 동족을 죽인 총의 흔적”을 서늘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절개와 기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그림 두 점 사이에 광주 희생자의 ‘해골’이 눈을 뜨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다. 세 개의 작품은 “역사 속 상처의 기억이 남겨진 과제이고…상처입은 사람만이 타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김 화가는 “무등산의 무등은 평등을 넘어선 말이다. 무등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가 한국 민주주의와 세계 인권 역사의 큰 지표가 됐다”며 “광주가, 무등이 용서와 화해로 따뜻하게 한국 사회와 세계를 끌어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광주시립미술관서 8월13일까지
‘검은 먹 한 점’ 광주 첫 초대전
초기작 ‘아파트’ 등 60여점 내놔
‘민주투사’ 김남주, 이강 인물화
5월 광주 다룬 ‘표적’ 등 신작도

암각화 연구로 박사 받고 책도

김호석 작가의 &lt;표적&gt;(2023).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의 <표적>(2023).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황희, 정약용, 신채호, 안창호 등을 그린 인물화도 만날 수 있다. <황희>는 조선 시대 재상 황희가 네개의 눈을 부릅뜨고 부조리한 세태를 꾸짖기 위한 작품이다. 처음 이 그림을 보고선 ‘청백리’로 이름이 높지만, 한때 뇌물수수 사건 등으로 행적에 오점을 남긴 점을 떠올려 붉은색 2개의 눈과 감청색 2개의 눈이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낸 그림으로 ‘오해’했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김 작가가 이 작품을 그리기 전 심경을 담은 ‘작가 노트’를 발견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고 김남주 시인의 초상은 검열로 발행되지 못했던 <전남매일> 1980년 5월19일치 신문 지면에 겹쳐 그렸다. 박정희 유신을 비판하는 전국 첫 유인물을 뿌렸던 이강씨는 김남주 시인의 친구다. 이강의 왼쪽 눈을 그린 <이강 진>은 과감한 생략법으로 화폭에 눈만 존재한다.

김호석 작가의 &lt;황희&gt;(1988).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의 <황희>(1988).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의 &lt;이강 진&gt;(2022).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의 <이강 진>(2022).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농촌 풍경화의 대상은 민초들이다. <분노를 삭이며>에서 “울분을 참고 있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피폐한 농촌 현실을 통렬하게 포착한 작품”(김형수 시인)이다. 흥미롭게도 인물화와 풍경화의 일부 모델은 가족들이다. 그는 가족공동체의 따뜻한 풍경을 섬세한 필치의 작품으로 보여준다. 이 가운데 <마지막 선물>은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보청기를 건네주는 순간을 담아, 뭉클한 울림을 준다.

김호석 작가의 &lt;마지막 선물&gt;(2018).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의 <마지막 선물>(2018).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 작가의 작품 속엔 좀벌레와 파리, 쥐 등 ‘미물’들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미물들이 생명력 있게 살아온 이유는 ‘절제’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들은 죄를 지을 만한 힘도 없었다. 인내하며 살아온 힘이 수억 년을 지속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크게 그린 ‘쥐꼬리’를 보면, 섬뜩하다. “동양화에서 난초를 칠 때 ‘끝은 생명을 응축하고 있는 쥐꼬리처럼 하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쥐꼬리 그림을 아무리 보여줘도 이런 사실을 잘 모릅니다. (쥐꼬리 그림을 통해) 원형에 대한 연구와 천착 없이 현대적 변용은 갈 길이 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김호석 작가 &lt;모기는 동족을 먹지 않는다&gt;(2023).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 <모기는 동족을 먹지 않는다>(2023).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 화가는 공부하는 작가다. 한지와 먹을 고집하는 그는 암각화 연구로 동국대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0년대 초 유목민 유전자의 기백을 확인하려고 몽골초원으로 달려갔다가 지금까지 암각화를 연구하고 있다. 선사시대 암각화를 분석한 <한국의 바위그림>(문학동네 펴냄)을 낸 바 있다.

김호석 작가 &lt;수박씨를 뱉고 싶은 날&gt;(1997).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김호석 작가 <수박씨를 뱉고 싶은 날>(1997).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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