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글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1536~1593)이 1566년 처외조부에게 보낸 간찰(경기도박물관 소장). 안동교 부장 제공
“할아버지께 답장을 올립니다.”
조선 시대 한글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정철(1536~1593)은 병인년(1566) 정월 18일에 쓴 편지의 첫머리에 처외조부를 조부라고 썼다. 이 편지는 약 460여 년 전 163자(피봉 포함)의 짧은 편지로, 송강집에 실려 있지 않다. 한학자인 안동교 한국학호남진흥원 자료교육부장이 최근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한 ‘송강 정철이 환벽당 김윤제에게 보낸 편지’(가로 28.4㎝×세로 31.3㎝)를 발견해 처음으로 해제했다.
정철의 처외조부는 김윤제(1501~1572)였다.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와 나주 목사 등을 지낸 김윤제는 1564년 5월 초에 성주 목사로 부임해 목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안 부장은 “이 편지는 정철이 35살이나 웃어른인 처외조부에게 행서와 해서체로 단아하게 직접 쓴 것으로, 사연이 흥미롭다”라고 말했다.
정철이 처외조부를 조부로 불렀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화에 연루됐던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던 정철은 16살 무렵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담양에 머물면서 첫 스승 김윤제를 만났다. 당시 김윤제는 낙향한 뒤 환벽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중이었다. 정철은 1552년 김윤제의 외손녀와 혼인해 4남 3녀를 뒀다. 정철은 김윤제의 따뜻한 후원에 부응해 1561년 진사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듬해 문과 별시에 당당히 장원급제했다.
안동교 한국학호남진흥원 자료교육부장. 정대하 기자
훗날 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지낸 정철은 당시 형조정랑 자리에 있었다. 안 부장은 “편지에서 처외조부에서 ‘처외’자를 빼고 자신의 조부처럼 불러 고마움과 다정함을 함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김윤제는 열두 살 된 외증손녀의 혼사를 주선하기 위해 가문과 품성까지 적어 정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철은 “딸 아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습성이 아직 교화되지 못하였으니 천천히 6, 7년을 기다렸다가 혼사를 논의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정철은 편지 말미에 ‘손식’(孫息)이라고 적는다. 손식은 손자라는 뜻으로, 친밀함과 다정함을 표현한 말이다. 훗날 정철은 소격서 참봉에 임명된 이지남의 맏아들을 맏사위로 맞는다. 정철의 맏사위가 김윤제가 소개한 신랑감과 일치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안 부장은 “세월이 오래된 만큼 편지 곳곳에 좀먹은 흔적들이 역력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옛 편지들을 통해 옛 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안동교 부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