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나온 ‘영산포발전지’ 발굴
일본인 상공회의소 회장이 발행
지역 시설과 인구 등 상세히 담아
전체 가구 403호 중 일본인 259호
“영산포 관련 사진, 사료적 가치”
“‘영산포발전지’는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이주한 뒤 건설한 새도시의 모습을 총서로 기록한 것입니다.”
1916년 3월 일본인 아키모토 가잔이 쓴 ‘영산포발전지’를 지난해 말 발굴한 윤여정(68) 나주문화원장은 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 책은 총 20장 133면으로 구성돼 있으며, 영산포라는 신도시의 학교, 우편소, 전화국 등 당시 근대 도시 각종 시설과 인구 수 등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 총서는 당시 비매품이어서 그간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윤 원장은 “총서 발행인은 당시 일본인 영산포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나오지만, 저자가 영산포에 살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윤 원장은 15년 전부터 나주 관련 기록이 실린 옛 신문기사를 찾아봤다. 독립신문, 한성순보, 대한매일신보 등 한말 기사와 일제 강점기에 나온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소규모 신문사 등의 국내 기사, 경성일보, 조선신문, 부산일보 등의 일본어 신문도 검색 대상이다. 그는 ‘조선신문’(1924년 11월6일)에서 ‘영산포발전지 간행’이라는 기사를 처음 읽은 뒤, 지난해 10월에 일본 국립정보학연구소에 소장돼 있다는 것을 알고 지인을 통해 1924년 발행본보다 앞서 나온 1916년 영산포발전지 출간본을 발굴했다.
전남 영산포는 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진출이 활발했고 소금과 젓갈, 쌀과 면화 등을 실은 선박들이 오가면서 번성했던 도시다. 윤 원장은 “영산포는 당시 나주군 지량면, 양곡면 일대였다. 배를 타고 영산포에 온 일본인들은 처음에 조성한 마을을 원정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영산포발전지’를 보면, 1915년 12월 말 기준 영산포 총가구 403호 중 일본인이 259호, 조선인이 136호였다. 거주자 1949명 가운데 일본인이 1095명이고 조선인이 826명이다. 이주 일본인 중 후쿠오카 출신이 209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규슈 지방 이주자들이었다.
영산포는 일제강점기 때 남도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수탈해가는 거점이었다. 영산포우편소는 1904년 문을 열었고, 전신전보는 1907년 2월1일, 전화는 1908년 4월1일에 개통됐다. 영산포공립심상소학교는 1906년 7월 문을 열었다. 영산포엔 영산포헌병대, 동양척식주식회사 영산포출장소,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1909년) 등이 있었다. 의사와 수의사, 산파가 각 1명씩 있었다. 윤 원장은 “목차 뒤에 실린 영산포 관련 사진 14장, 인물사진 2장은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사진들이다. 영산포 시대사를 조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 원장은 일제강점기 나주 관련 신문 자료를 분류해 2500쪽 분량으로 묶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를 보면, 광주학생운동, 궁삼면 농민운동, 소작인 관련 등의 역사와 나주 인물, 학교·철도·역·도로·교량·하천 등 각종 시설의 변천,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주문화원은 일제강점기 때 나온 책을 꾸준히 발굴하고 있다. 윤 원장은 영산포의 또 다른 일본인 사호리 신조가 쓴 ‘영산포에서의 일본인 거리 형성’과 ‘영산강 하류 지역의 문화’도 번역할 계획이다. 그는 “1910년 10월 남평군수가 작성한 ‘조선 전라남도 남평군 상세 일반’이라는 자료 등도 출간해 나주와 영산포, 남평의 근대 미시사 풍경을 복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