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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6주 동안 바라본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 이야기

등록 2019-07-03 09:42수정 2019-07-04 09:40

[한겨레21]
한국지엠과 현대중공업이 빠져나간 도시
6주동안 머물며 기록한
도시와 사람의 이야기
·서문
·1장 살아남자 : 2018년 2월
·2장 하늘엔 애드벌룬 떠 있고 : 2008년 5월
·3장 이제는 놓아야 한다 : 2016년 12월
·4장 180만원 입금마저 끊기고 : 2019년 4월
·5장 그래도 기계 다섯 대는 돈다 : 2019년 5월

폐쇄된 한국지엠 군산공장 정문.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폐쇄된 한국지엠 군산공장 정문.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4월23일부터 5월31일까지 약 6주 동안 <한겨레21>은 전북 군산에 머물렀다.

사람. 군산 사람 30명과 이야기했다. 모은 말들은 A4용지 170쪽 분량이다. 7만 단어 정도 된다. ‘공장이 떠나갔고 군산은 위기를 겪고 있다’라는 한 문장을 풀어내는 데 그만한 단어가 필요했다. 야속하다고 말했다. 반성한다고 말했다. 고민한다고 말했다. 포기했다고 말했다. 바란다고 말했다. 서로 위로했다. 때로 불신했다. 질서가 와르르 무너지던 날, 몸 전체에 퍼졌던 낯선 감각과, 스쳤던 생각의 조각들을 풀기에 단어는 모자랐다. 한계 속에 최대한 되살려 옮기고자 했다.

성장. 30년 가까이 도시 제조업이 성장했다. 대기업 생산 공장을 정점으로 견고한 질서가 구축됐다. 질서 어딘가 사람들이 자리잡았다. 하청과 본청, 비정규직과 정규직, 지역 생산기지와 수도권 본사를 갈라 비용을 줄이고 혁신해가며 한국 제조업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시간과 대체로 겹친다. 공장이 떠났고 위기는 지역 도시에 한정해 국지적으로 벌어졌다. 사람 사이 갈린 결을 따라 충격이 번졌다. 나·우리·여기의 위기가 아닌 타인·그들·그곳의 위기였다. 이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런저런 일들을 거쳐 다른 자리에서 더 넓은 것을 보게 된 것을 성장이라고 이를 수 있다면, 도시가 성장을 멈추자 군산 사람들은 성장했다. 다만 변한 마음만큼 움직일 자리는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야기는, 고민하고 반성하는 이들의 불완전한 성장담으로 흘렀다.

다른 도시. ‘국가’를 주어로 놓아서는 보이지 않는, 지역에만 절체절명인 위기 앞에 군산은 당혹스럽다. 군산만의 일은 아니다. 쨍강대는 쇳소리, 굴뚝 연기가 성장의 전부인 도시는 국토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집적, 창의성, 4차 산업혁명, 슈퍼스타 도시의 부상 같은 세련된 단어들 앞에 내세울 것 마땅찮은 도시들은, 함께 초라하다. 어마어마해 보였던 동쪽 해안가 도시에서도 조선업을 지켜내기 위한 아우성이 한창이라는 소문이 군산에 당도했다. 한때 동경했던 그 도시 이야기를 군산 사람들은 다소간의 위로, 그보다 큰 안타까움과 공감을 덧붙여 나눈다.

<한겨레21>은 군산과 비슷한 시간 조선업 본산인 울산 동구에도 머물렀다. 견고했던 조선업 도시에 밀어닥친 충격과 세밀한 여파를 담은 기록은 군산 이야기에 뒤이어 다음호(제1270호) 지면에 소개된다.

이야기. 이어질 ‘공장이 떠난 도시-군산 편’은 5개 장으로 구성됐다. 도시의 질서가 만들어져 정점에 이르고 해체되는 이야기다. 각 순간 그 질서 어느 자리엔가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을 모았다.

첫 장에서 한국지엠(GM) 공장의 정규직·비정규직 퇴직자와 살아남은 이들이 등장한다. 산업을 꾸려온 질서가 바닥부터 뒤흔들리는 구조 변화 속에 보듬어야 할 충격의 양상이 얼마나 다양한지 ‘살아가는 모습’으로 대신 말한다. 두 번째 장 주인공은 질서를 짜며 도시가 정점에 이르렀던 2009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그 정점에 한껏 들떴던 스스로에게 ‘거기 이 위기의 씨앗은 없었느냐’고 엄격히 묻고 반성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장에서 협력업체와 도시 상인들은 질서가 가진 구심력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노라고 했는데 돌아보니 휩쓸려다녔을 뿐’이라는 깨달음은 서글프다. 다섯 번째 장에서 군산 사람들은 불완전한 희망을 꿈꾼다. 공장이 떠난 지 1년째 되는 날 불안한 희망을 좇아 누군가 일단 내달리고, 누군가 여전히 머뭇거린다.

이야기는 2018년 2월13일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폐쇄를 공식 발표한 날부터 시작한다.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 : ① 흩어진 사람들
____________________

살아남자: 2018년 2월
폐쇄 결정 공식 발표, 흩어진 사람들

·서문
·1장 살아남자 : 2018년 2월
·2장 하늘엔 애드벌룬 떠 있고 : 2008년 5월
·3장 이제는 놓아야 한다 : 2016년 12월
·4장 180만원 입금마저 끊기고 : 2019년 4월
·5장 그래도 기계 다섯 대는 돈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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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없는 군산 오식도동 원룸촌 거리.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18년 2월13일 오전 9시, 한국지엠(GM)이 군산공장 폐쇄 일정(2018년 5월31일)을 공식 발표했다.

그날 김성우(49·가명)는 여느 날처럼 공장에 들어섰다. 문자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휴대전화 진동이 수차례 울렸다. 이미 있던 소문을 확정하는 말들,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새로운 소문을 담은 말들이 휴대전화 화면에 번졌다.

군산시청 공무원 백일성은 9년 전 산업단지 서쪽 끝자락에서 맞잡았던 대통령 손을 떠올렸다. 그 축제의 날 견고히 세웠다고 믿었던 질서가 와르르 무너졌다.

한국지엠 협력업체 창원금속공업은 고요했다. 가끔 참다못한 한숨이 비져나왔다. 이 회사 총괄이사 이정권은 잠깐 억울했고 이내 시원했다. 산업단지 질서를 22년 동안 쥐고 흔들어온 절대적 존재가 사라졌다. 내던져진 질서 바깥에는 자유도 있을 터였다.

한국지엠 군산공장 비정규직 김남근(37)의 휴대전화는 그날로부터 13일 뒤 울렸다. 근로계약 해지 통보서였다. 메시지를 먼저 읽은 아내가 휴대전화를 건넸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충격의 순간에 늘 그래준 사람, 그래서 고마웠다.

이 회사가 어떤 회산데

그날 고현창(43·가명)은 공장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공장에 나가는 일이 흔했다. 자동차 27만 대(2011년)를 만들던 공장은 2018년 3만 대를 생산했다. 안경 너머 작지만 민첩해 보이는 눈이 뉴스 화면을 훑었다.

[속보]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결정.

15년을 일한 공장 이름과 나란히 놓인 ‘속보’ ‘폐쇄’ ‘결정’이라는 단어들이 단호해 낯설었다. 정보가 급했다. 날이 밝자마자 쉐보레 캡티바를 몰아 공장으로 내달렸다. 3년 전 직원 할인을 받아 산 가족의 유일한 차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이 회사가 어떤 회산데.”

이 회사는 그를 처음 정규직으로 품은 회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군산을 떠나 수도권을 돌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지금 아내와 결혼하려고 좀더 나은 직장을 찾았다. 그때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며 따놓은 지게차 면허가 생각났다. 2003년 한국지엠 사내하청 업체에 입사했다. 지게차를 몰아 자재를 날랐다.

거대한 자동차 공장은 겉보기에 그럴듯했다.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대우자동차가 내놓은 공장을 막 인수한 한국지엠에는 일감이 없었다. 비정규직 임금은 일감에 비례했다. 월급 49만원을 받은 기억도 있다. 숱한 비정규직이 못 버티고 떠났다. 그래도 묵묵히 일했다. 공장이 자리를 잡아가며 바쁜 날들이 시작됐다. 2005년 정규직 발탁 채용 기회가 왔다. 서류를 넣고, 면접을 치르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마침내 정규직이 됐다. 둘째를 배 속에 품고 있던 아내가 울었다.

정규직으로 용접 불꽃이 튀는 차체 라인에 섰다. 일하는 동안 비정규직 동료들과 자주 스쳤다. 그들은 아직 지게차를 몰고 있다. 어색한 마음은 되도록 감추려고 애썼다. 처지가 달라졌어도 형이고 동생이었던 이들이다. 이들에게 “변했다”는 말만큼은 듣기 싫었다. 대놓고 말은 못했어도 처음 안정감을 맛보게 해준 회사에 애착이 커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정규직이 되었다’는 교훈 섞인 이야기 정도를 언젠가 아빠의 인생을 묻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을 테지.

정규직이 되고 13년 만에 아빠 인생에 파란이 왔다. 성실히 일하는 것만으로 어쩔 도리 없는, 고현창의 능력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성실한 노력’ 따위 판에 박힌 교훈이 현실에 안 통했다. 폐쇄 발표로부터 1차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 마지막 날(3월2일)까지, 남은 시간은 2주 남짓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선택을 하는 것뿐이다. 희망퇴직과 회사 잔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남는다면 창원공장으로 갈지 부평공장으로 갈지 정해야 했다. 온갖 소문과 한탄과 구호 속에서 모두가 길을 헤맸다. 그도 그랬다.

“남아봐야 소용없다. 버티다보면 희망퇴직금조차 없이 빈손으로 나갈 거다.”
“군산 다음은 어차피 창원공장이다.” “부평공장이라고 안전하겠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도 정규직들은 울산으로 보냈으니 우리도 정규직은 살릴 거다.”

“성공한” 이동

혼란한 그의 귀를 붙드는 말이 있었다. “어떻게 정규직 된 회사냐. 망할 때 같이 나가더라도 그때까지는 일해야지.” 며칠 전 둘째 아들은 집에만 있는 아빠에게 말했다. “나 이제 학원 못 다니는 거야?” 부모의 불안을 눈치챌 만큼 아들은 쑥쑥 자랐다. 정규직 전환이 됐던 날 아내 배 속에 있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다. 회사에 남기로 했다.

‘전략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공장 규모나 비전 면에서 부평공장이 창원보다 나아 보였다. 남기로 한 이들 대부분이 부평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현창은 “앞날의 비전보다 경쟁률 낮은 데를 쓰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원을 써냈다. 예상대로 회사에 남기를 희망한 650여 명 가운데 창원으로 이전 배치를 희망한 사람은 8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58명이 창원에 배치됐다. 6월1일 희망퇴직자는 더는 한국지엠 직원이 아니었다. 고현창은 한국지엠 직원으로 살아남았다.

실제 공장 배치는 한 달여 늦춰졌다. 7월 첫날에야 짐을 쌌다. 낚싯대와 골프채를 챙겨넣었다. 즐기며 살리라 다짐했다. 특별한 저녁 식사도, 긴 인사도 가족과 나누지 않았다. 작별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싫었다. 어차피 매주 볼 수 있다. 아내가 캡티바를 운전했다. 그는 조수석에 앉았다.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차는 아내에게 맡기기로 했다. 어차피 새로 머물게 된 대우 사원 아파트는 한국지엠 창원공장과 남산천을 사이에 두고 면해 있다. 슬슬 걸어다니면 된다. 아내와 차가 그를 낯선 땅에 두고 떠났다. 1991년 지은 창원 대우 사원 아파트 공기는 퀴퀴했다. ‘그래도 혼자서 이만하면 됐다.’ 고현창은 생각했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내려앉은 그날 이후, 고현창의 변화는 그저 210㎞ 정도 떨어진 낯선 도시로 이동에 불과했다. “성공한 것”이라고들 주변에서 말했다. 그 역시 부정하지 못했다. 불안과 고민, 길이 갈린 동료, 멀어진 가족,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따위는 성공에 따르는 미미한 생채기에 불과하다고 일단, 생각하기로 한다.

그날로부터 2019년 5월에 이르기까지 고현창이 사라진 군산에서 ‘위기’라는 단어는 수천, 수만 번 적히고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군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가 됐다. 그 위기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로 ‘실직과 그로 인한 경제적 몰락’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경제위기 속 개인의 처지를 나타내는 모범답안에 가까운 설명이다. 한국지엠 희망퇴직자 김성우는 그런대로 새 일을 찾았고 극심한 경제적 추락을 겪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군산의 정점이라 이를 만한 10년 전 지어진 미룡동 한 아파트에서 걸레질하다가 문득 느낀 불안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마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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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업체를 차린 김성우(가명)와 동료들이 아파트 청소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청소 프로의 세계

5월13일, 군산 미룡동 48평 아파트에서 김성우는 다섯 번째 걸레를 쓰고 있다. 걸레는 쉽게 너절해졌다. 흰 등산용 셔츠에 일하기 위해 새로 산 3만9천원짜리 진보라색 운동화를 신었다. 긴 드라이버와 걸레 뭉치를 꽂은 검은 가방까지 허리춤에 걸치고 나니, 제법 청소노동자 태가 난다. 그는 지난 4월 청소업체 ‘청소드림’을 차렸다. 친환경 청소를 강점으로 내걸었다. 세제 하나도 비싼 걸 쓴다. ‘스샤샤샥’ 수세미로 밀고, ‘이번에는 부디’ 하는 마음으로 밀어낸 자리를 걸레로 훔친다. 여전히 곰팡이는 남아 있다. “이건 속까지 곰팡이가 파먹은 거야. 어떻게 해도 안 돼.” 청소 베테랑인 동료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 일을 시작한 첫날처럼 네 시간 동안 창틀 하나를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괜히 혼자 읊조린다.

어쩌면 차체 라인에 서 있던 고현창도 큰 눈을 끔벅거리며 웃음기를 걸고 다니는 김성우를 공장에서 몇 번쯤 마주쳤을지 모른다. 김성우는 공장 모든 라인에 빠짐없이 제대로 된 자재를 보급하는 일을 했다. 정규직이었고 직급도 높았다. 사람 좋은 김성우도 종종 화를 냈다. ‘자재가 놓인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괜히 심통을 부리는 라인이 있었다. 대개 비정규직이 표적이 됐다. 그럴 때면 라인으로 대신 달려가 쓰레기통을 뻥 발로 찼다. “그렇게 안 하면 일이 안 돌아갔거든. 일단 화내고 돌아서서 좋게 이야기하는 거지.” 어쩌면 차체 라인에 서 있던 고현창이 본 그의 모습은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위악이었을지 모른다. 다양한 얼굴을 준비하고 다니는 여느 직장인 같은 모습으로 그도 1년 전까지 공장에 있었다.

첫 몇 주 동안 청소일이 부끄러웠다.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 대충 “집안일 하고 있다”고 둘러댄 적도 있다. 전주제지(현 한솔제지)에서 대우자동차로, 이름을 바꿔 단 한국지엠에 이르기까지. 30년 가까이 그가 일해온 회사는 전북 지역의 주력 일자리였다. 누구나 이름을 알았고, 힘들 때 지역이 돕고 잘나갈 때 지역을 돕는 회사가 자랑스러웠다.

청소 베테랑인 동료들을 보며 머리로는 깨우친다. 이 일, ‘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제대로 하려면 아무나 할 수 없는 프로의 세계’다. 최근 들어서야 김성우는 조금씩 사람들에게 청소일 한다고 말한다. “이 바닥은 홍보가 생명이다. 2년 안에 결판내지 않으면 이 일에서도 떠나야 한다.” 움츠러들고 싶은 마음을 머리로 눌러본다.

군산의 밤, 지독한 불황이라고 해도 희끗희끗한 중년들이 수송동으로 나운동으로 몰려가 삼삼오오 술을 마신다. 잠깐 기분일 뿐이라도 큰 위로가 된다. 농담하고 서로 놀리다, 과거를 떠올리고, 이내 걱정으로 이어지고 마는 두서없는 말들을 묵혔다, 쏟아낸다. 김성우도 그 틈에 섞여 옛 직장 동료를 만난다. 자주 찾는 횟집이다. 소라, 멍게, 완두콩, 산낙지 따위가 회를 둘러싸고 탁자를 가득 채웠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두어 잔을 마셨다. “나는 이제 소주.” 한 동료가 선언하자 모두 따라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마주 앉은 이들은 김성우가 거리낄 것 없이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는 이들이다. 공장을 함께 나왔고 경쟁적으로 자격증을 땄다. 재취업 낙방에 모여 서로 위로했다. 함께, 같은 것을 겪었다. 이들 말고 누구도 자동차 공장 정규직 노동자였던, 고연봉에 희망퇴직금까지 받고 나온 김성우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자랑스럽던 일이 예상치 못하게 막 내렸다. ‘한 사람으로 홀로 섰을 때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50대가 코앞’이라는 막막함은 입에 올리는 순간, 욕을 부르는 배부른 소리로 여겨졌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을 별달리 익히지도 못했다. 자동차 공장 일 절반은 기계가 맡고 있다.

임금도 지위도 내려놓고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김성우와 동료들은 주로 ‘내려놓을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전의 임금수준과 지위를 내려놓기로 했다. 김성우가 청소일에 뛰어든 이유다. 동료는 전주에 가서 13만원 주고 경비 교육을 받았다. 모델하우스 경비직에 도전했다. 낙방했다. “왜 이것조차 안 되나.” 납득하지 못하다, 처지를 돌아보고, 이해하고, 워크넷을 뒤지는 일상으로, 동료는 다시 돌아간다.

경비원일을 아쉬워하던 동료가 문득 묻는다. “요양보호사는 괜찮을까? 남자도 좀 필요하다잖아.” 실직한 뒤 동료는 가장 먼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근데 자신이 없는 거야. 요양보호사 하는 ○○○한테 전화해서, ‘뭐 하고 있냐?’ 했더니 짜증이 팍 섞인 목소리로 ‘똥기저귀 갈아!’ 그러더라고. 그렇게 즐겁게 노인 봉사하고 했던 애가 일이 되니까 괴로운 거야.”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김성우는 일이라는 게, 구조조정이라는 게 무엇인가 생각한다. 어떤 동료는 작은 공장에 취업하고 사흘 만에 잠수를 탔다. 많은 동료가 재지 않고 창업에 나섰다가 망해 나간다. 군산을 싸고도는 한국지엠 출신들의 실패담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정규직 실직자라는 비난을 더했다. 공감보다 조롱이 쉬운 시대다.

더는 내가 필요 없어진 장소에서 그래도 내가 필요한 곳으로 일터를 옮기는 것, 사람들은 이런 것을 구조조정이라고 했다. 겪고 보니 구조조정은 그저 자부심 가지고 일하던 일터에서 당장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일터로 이동하는 것만 의미했다. 둘러본들 또 다른 구조랄지 거기 걸맞은 새로운 일자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 일자리가 기술 없는 중년 실직자를 받아줄 리도 없다. 세련되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에 꼭 필요한 일들- 그의 청소일이나 동료가 바랐던 요양보호사 같은- 은 사회적 시선과 처우가 여전히 낮다. ‘눈 낮추라’는 압박과 ‘꼴 좋게 그런 일 하고 있다’는 조롱 사이에서 한쪽을 택하고 버티는 것이 ‘그날’ 이후 한국지엠 실직자의 운명인 걸까.

생각하는 사이, 이야기는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비정규직으로 돌연 튄다. “내 처지가 이렇게 되고 보니 비정규직들 생각이 나. 솔직히 그 사람들 힘든 일 많이 했고, 돈도 덜 받았어. 자존심 상할 때도 많았을 거야.” 동료의 말을 김성우가 받는다. 술기운에 회한과 죄책감과 변명이 뒤섞인다. “인간적으로는 제대로 대하려고 했어. 그런데 주말 특근이든 청소든 정규직들은 하기 싫다고 해버리면 나오게 할 도리가 없었어. 조장님한테 부탁하면 비정규직들은 바로 나왔어. 정말 열심히 했어. 그래서 미안했어. 구조가 그랬어.” 필요했지만 필요한 만큼 대우하지 못했던, 공장 점퍼에 소속회사 이름을 하나 더 붙이고 다녔던 동료들 얼굴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들에게 그 공장은 당당하게 내 직장이라고 말하기 위해 다소 머뭇거림이 필요한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의 일처럼.

가장 긴 해고

강민우(45·가명)는 그날 밤 김성우와 동료들이 생각한 한국지엠 비정규직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제 그는 군산항 부두에서 트럭 운전자에게 화물을 배분한다. 돈이 되는 화물, 쉬운 화물, 힘든 화물을 갈라 되도록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새 일의 핵심이다. 지난해 3월 한국지엠 공장을 나오고 한 달 만에 일을 구했다. 군산과 함께 쪼그라드는 군산항에서 일을 구한 건 운이 좋았다. 군산항 물동량은 2017년보다 지난해 4.8% 줄었다. 대개 그는 작은 행운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무언가 하나씩 어긋나는 운 없는 삶이 강민우를 쉽게 만족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가 자동차 공장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게 1997년이라는 점부터 불운은 자명하다. 군산 대우자동차 직업기술훈련원에 들어갔다. 훈련원에서 차곡차곡 교육받고, 일본 스즈키자동차 공장에 가서 연수받고 오면 대우차 공장의 정식 직원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즈키와 대우가 티코를 함께 개발한 인연으로 만들어진 취업 통로다.

훈련원 수료를 두 달 앞두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해외연수도 취직도 물거품이 됐다. 대우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꿈은 포기했다. 다른 지역을 떠돌았다. 택시 운전을 하고, 택시 보험 처리 일을 하다가, 패널 건물을 지으러 다녔다. 그때 처음 강민우는 경제위기를 깨쳤다. ‘어딘가 머물겠다는 꿈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다른 도시들을 전전하기를 멈추고 5년 만에 다시 한국지엠 군산공장으로 돌아왔다. 비정규직으로 공장에 섰다. 고현창과 같은 해 한국지엠에 들어왔지만, 그와 달리 정규직은 되지 못했다. 소속 회사는 공장 안에서 일했던 15년 동안 세 번 바뀌었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엔진을 만들었을 뿐이다. 협상에 실패한 사내하청 회사가 나가고 엔진 조립 라인에 새 회사가 들어오면 소속은 새 회사로 바뀌어 있었다. 공장 사정에 맞춰 들고 나고, 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소속 회사가 바뀌는 일에 익숙해졌다.

2015년 비정규직들이 무더기로 회사를 떠났다. 지엠이 유럽 시장 철수를 본격화하며 그해 군산공장 자동차 생산량은 7만 대로 급감했다. 그는 자리를 지켰다. 돌연 떠난 비정규직 동료들이 회사 앞에 천막을 쳤다. 함께 싸우지 않았다. 생산이 줄면 가장 먼저 내보낼 수 있도록 비정규직이 있고, 그도 그중 하나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가족의 밥이 되는 3천만원 정도 연봉에 익숙해졌다. 만족했다. 굳이 ‘차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그들을 위해 힘껏 싸워줄 수 있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다.

그날, 2018년 2월13일 이후로 사실 강민우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장은 떠난다. 우리도 떠난다.’ 한국지엠에서는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했다. 마음 졸이던 중에 마지막 소속 회사에서 그와 몇몇 동료를 불렀다. 공장이 문을 닫아 3월31일부로 계약이 해지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나가는 것이냐”고 회사에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보상도, 앞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단도 제시하지 않았다. 처음 공장을 떠나서 흘러다녔던 것이 1997년, 그때부터 그래도 21년 지났다. 불운은, 불운을 낳는 세상은 참 질기게도 변하지 않았다.

강민우는 해고 통지를 받은 다음날 소룡동 용문초등학교 대강당에 나갔다. 같이 엔진 라인에 나란히 서서 일했던 홑벌이 아빠 김남근도 나와 있었다. 그렇게 비정규직 190여 명이 모였다. “일단 시청으로 가자”고 누군가 말했다. 시청에 가서 난생처음 기자들을 만났다. 잠깐 화제가 됐다. 이내 관심은 정규직 희망퇴직자로 옮겨갔다. 전체 경제 관점에서건(고연봉 일자리가 1천 개 이상 사라진다), 극적인 관점에서건(희망퇴직 조건과 퇴직과 잔류의 기로에 선 노동자), 조직력 관점에서건(협상 가능한 노동조합) 비교되지 않았다. 용문초등학교에 모인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몰랐던 이들이다. 한국지엠에도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있지만 강민우가 굳이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2015년 회사를 떠난 비정규직을 위주로 꾸려졌다.

누군가의 기쁨, 누군가의 고통

급한 대로 비정규직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비대위 위원장은 미국 디트로이트를 자비를 털어 다녀왔다. 울타리에 가로막혀 회사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SAVE!! Gunsan GM workers & Their families from shut down”(군산 지엠 노동자와 가족을 공장 폐쇄에서 구해주세요). 손으로 간절하게 문구를 쓴 팻말을 눈여겨보는 이는 적었다. 미국 제조업 몰락의 상징적인 도시 디트로이트가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지는 것 같다”는, 큰 위로가 되지 않는 이야기 정도만 교민에게 건너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군산공장이 문을 닫자 말했다. “그들(GM)이 한국에서 디트로이트로 돌아오고 있다.” 누군가의 기쁨만큼 누군가의 고통을 더하는 천칭이 지구 반대편까지 뻗어 있다는 걸, 위원장이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강민우는 새삼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급하게 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지엠의 비정규직, 특히 30~40대 젊은 축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정부와 고용기관에 ‘모범적인 케이스’다. 독려하고 관리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새 일자리를 구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애태웠던 정규직 노동자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김정화 군산 고용위기지원센터 팀장) 비정규직으로 살아왔기에 임금과 처우에 까다롭지 않고, 희망퇴직금을 받지 못해 다급했으며, 무엇보다 옮겨지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뒤따른다.

그러나 강민우의 해고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을 벌였다. 한국지엠의 비정규직 고용이 불법파견이었고, 그러므로 우리 역시 정규직이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소송이다. 3년 치나마 정규직과 임금 차이를 보전받기 위한 임금차액 청구소송도 같이 진행한다. 결판이 날 때까지 해고는 끝나지 않는다. 살아오며 만족의 기준을 줄이는 데 익숙했던 그도 이번만큼은 참지 않았다.

소송에는 대가가 따랐다. 소송에 참여하는 비정규직은 회사가 뒤늦게 제시한 1천만원 위로금을 받지 못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강민우를 형처럼 따라온 김남근에게 특히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희망퇴직금에 견주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그는 홑벌이로 아이 둘을 키운다. 아내는 일을 멈추고 대학에 다니고 있다. 간호조무사 일이 적성에 맞아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내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다. 아내가 대학에 간 지 2년 만에 공장이 문을 닫았다.

무엇보다 한국지엠은 희망퇴직을 써내지 않은 정규직마저 소화하지 못하는 회사다. 끝내 한국을 버릴 가능성이 크다. 승소한다고 해도 돌아갈 공장이나 남아 있을까. 고민 속에 적잖은 비정규직이 소송을 포기했다.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나 그냥 한번은 우리도 그 공장 구성원이었다는 거 알려주고 싶어. 우리도 같이 일했던 사람인데 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하느냐고 말해보고 싶어. 근데 우리 처지에 1천만원, 큰돈이잖아.” 아내의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 돈 없어도 돼.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맞아.” 그도 민우 형을 따라 소송장에 이름을 올렸다.

조용히, 무기력하게

작지만, 각자에게는 절대적인 균열과 변화를 안고 한 공장에서 일했고 사라진 공장에서 함께 나온 이들이 흩뿌려졌다. 입자로 떠돌며 내 자리를 찾지 못한 채 공장 폐쇄 1년을 난다. ‘가장의 실직으로 거리로 내몰린 가족’이라는 익숙한 경제위기 서사는 군산 어딘가에 존재하겠지만 두드러지게 관측되지 않는다.

정규직에게는 급격한 추락을 막을 만큼 쌓아놓은 이런저런 자산과 희망퇴직금이 있었다. 비정규직은 서둘러 새 일을 찾았다. 격렬한 투쟁도 이어지지 않았다. “제2의 쌍용차 사태만은 막자”(김선화 군산 여성인력개발센터 관장)던 고용 기관들의 첫 다짐은 그런대로 지켜진 것처럼 보인다. 2009년 이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로 경기도 평택에서 올해까지 3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 사태 초기 군산에서 1명, 인천 부평에서 1명이 같은 길을 따랐다.

몇 번의 국가적 경제위기를 겪으며 터득한 응급조처는 지역 경제위기에서도 일정한 틀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고용위기종합지원센터를 꾸렸다. 실직자에게는 구직급여와 교육훈련, 달라진 현실을 깨닫고 서둘러 새 일을 찾아야 한다는 조용한 압박을 줬다. 그들의 가족에게는 희망근로 일자리를 제공했다. 마침 도시의 경기를 살리기 위해 추진했던 ‘군산 사랑 상품권’이 인기를 모았다. 동사무소마다 책상을 놓고 상품권 안내 업무를 보조할 일자리에 희망근로 참여자를 앉혔다. 그렇게 일단 일자리를 구하고 나면, 대체로 안심했다.

현재까지 한국지엠 실직자가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일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조사되지 않았다(‘군산시 고용위기 지역 모니터링 및 성과평가’ 보고서). “대략 30~40% 정도가 새 일을 찾았을 것”이라고만 고용 기관들은 추정한다. 희망근로 사업 덕분이라고는 해도 2018년 하반기 군산 고용률은 전년 같은 기간에 견줘 소폭(0.5%포인트)이나마 올랐다. 1년 만의 상승세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였다면 이런 응급처방만으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외부 충격이 가실 때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며 버틸 힘을 건네고, 원래 있던 산업 안에서 생산 혁신만 이끌어도 ‘위기는 성공적으로 끝장냈다’고 자신할 수 있던 시절이다.

2019년 나라를 이끌어온 산업이 통째로 변한다. 군산은 그 와중에 믿었던 산업을 먼저, 모두 잃었다. 처음부터, 새로, 무언가 찾아나서야 한다. 이 거대해 보이는 변화도 결국 사람의 일터, 처지, 관계, 삶터를 바꾸는 일에서 자유롭지 않다. 버틸 수단이 아니라, 변해갈 힘을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정부 정책은 별 도움이 못 된다. 갑자기 맞닥뜨린 변화 앞에 주저할 수밖에 없는 마음, 그러다 이내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예민하게 보듬지 않는다. 애초 이 위기 끝, 군산이 이르러야 할 새로운 자리도 흐릿하다. 공장이 사라지고 1년, 군산 사람들은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버티고 있다. 다만 바뀌고 나아갈 힘은 잃은 채 무기력하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고현창의 지난 1년은 어땠을까.

2019년 5월14일, 경남 창원의 더위는 군산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반소매 등산복을 입고 검은색 가방을 둘러멘 고현창 턱은 정리 안 된 수염으로 거뭇했다. “이 정도 더위일 때 여기 내려왔지.” 그렇게 고현창의 창원 생활도 곧 1년이 된다. 떠나오던 날의 공기와 습도, 두려움이 떠오른다. 공장을 옮기며 하는 일도 좀 달라졌다. 군산에서 맡았던 차체 업무 대신 조립 업무를 시작했다. 어깨나 팔 같은 큰 근육을 주로 쓰다 작은 부품을 쥐고 펴자니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다. 총을 쏘듯 중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를 구부리는 동작을 하자 뚝뚝 소리가 났다.

창원에 내려오고도 2주 정도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대기 상태로 있었다. 창원 노동자들이 반발하고 있다고 했다. “군산 구조조정 때 타협해놔서 우리 노동조건도 같이 안 좋아졌다.” “잔업·특근을 없앨 만큼 여기 사정도 안 좋은데 새 사람 받을 여유 없다.” 창원은 창원대로 웅성댔다.

5월 말부터 일감이 줄어 창원공장에서도 주말 특근은 사라진다. 곧 주간 2교대 근무가 1교대로 바뀔 거라는 소문이 돈다. 공장은 비정규직부터 차례로 직원을 내보낼 것이고, 근무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임금도 줄 것이다. 군산에서 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아는 수순이다. 그 풍경이 창원에서도 펼쳐지려 한다. “이 와중에 뜬금없는 군산 출신이라니, 당연히 싫겠지.” 고현창은 인정하면서도 괴롭다. 올해 들어 부평공장으로 옮겨졌던 군산 출신 노동자 가운데 상당수가 부평에도 일감이 없다는 이유로 창원공장으로 넘어왔다. 다시 만난 그들을 고현창만 반가워했다. 위기 앞에 경쟁자가 늘어난 창원공장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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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지 않은 손님

고현창은 그럴 때면 회사를 떠난, 회사에는 남아 있지만 아직 공장을 배치받지 못한 동료들이 떠오른다. 함께 군산에서 온 동료에게 묻는다. “한번 만나자고 해볼까?” 동료가 답한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해. 서로 불편하지.” 맞는 말이다. 여전히 옛 동료들과 묶여 있는 메신저 창은 남아 있다.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아직 공장을 배치받지 못한 동료 한 명은 일상을 알리던 메신저 소개 사진마저 모두 지웠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차마 묻지 못했다.

아내는 일을 구했다고 한다. 전주의 한 정육 공장에서 고기를 포장하고 150만원 정도 받는다. 아이를 돌보고 가사노동만 해오던 아내가 처음 직장을 구했다. 당장 임금이 끊기지 않았다. 남들보다 덜 버는 편도 아니다. 그래도 아내는 굳이, 지독히 아끼고 모으려고 한다. 한번 겪었던 위기로 배운 건,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모아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아내 모습을 보며 밥은 최대한 회사에서 먹겠다고 다짐한다.

쑥덕거림과 그리움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아껴야 한다는 강박. 버티기 위해 견뎌야 할 것들 사이에서 요즘 그를 무기력이 지배한다. 함께 창원으로 온 동료 대부분이 비슷하다. 의욕적으로 일했어도 군산공장은 망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눈치가 보이고 괴로울 때면 ‘나는 그저 돌덩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군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낚싯대와 골프채는 방 한쪽에 밀어뒀다. 꺼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매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가족은 동료들 차를 얻어타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만난다. 가봐야 잠만 자다 돌아온다.

무기력 속에 창원 사원 아파트와 맞붙은 편의점만 성행한다. 군산과 비교도 되지 않는 휘황하고 거대한 창원 도심에 나가 왁자하게 떠드는 동료는 거의 없다. 각자 방에 틀어박혀 편의점 안주를 펼쳐놓고 혼자 술 마시고 잠든다. ‘술은 쓰다’고만 생각했던 고현창도 뒤늦은 나이에 술을 배웠다.

글 방준호 <한겨레21> 기자 whorun@hani.co.kr,
사진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만화 이윤희, 그래픽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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