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제5차 발굴조사를 마친 완도 법화사지 발굴 현장. 5차 조사에서는 전체 담장을 발굴하며 법화사지 규모가 확인됐다. 완도군 제공
장보고(?∼841)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완도 법화사지(法華寺址, 전남도 기념물 제131호)가 삼별초 항쟁 역사의 중심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나왔다. 최근 마무리한 5차 발굴조사 결과, 사찰 전체 규모가 드러났지만 장보고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고 삼별초(1232~1273) 시기 유물이 다수 발견됐기 때문이다.
8일 전남 완도 장보고기념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완도 법화사지 사적 지정과 활용방안 모색을 위한 학술회의’에서 오정훈 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실장은 “법화사지는 높이 0.5m, 폭 1.2∼1.4m 외곽 담장이 정사각형 모양(둘레 283m)으로 둘려 있었고 내부면적은 5236㎡에 달했다. 담장 터에서 나온 기와 조각은 12∼13세기 고려 시대 양식이 대부분이었으며, 통일신라 시대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유물도 출토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역사적 사료와 발굴 유물이 일치하는 점을 보면 (이 사찰은)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돼 고려 중기 이후까지 지속해서 운영된 것으로 분석된다”고 발표했다. 법화사지는 1989년과 199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두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완도군의 의뢰로 2017년 5월부터 올해 9월까지 (재)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이 세 차례 추가 발굴조사를 했다. 오 실장은 3~5차 발굴에 참여했다.
완도 법화사지는 청해진 유적과 1.2㎞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장보고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완도군 제공
완도 법화사지는 통일신라 시대 유물 출토를 근거로 장보고가 창건했지만 장보고가 죽은 후 청해진과 함께 철거됐고 고려 시대에 재건됐지만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다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에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법화사지와 삼별초의 관련성에 대한 분석도 나왔다.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는 이날 ‘삼별초 항전과 완도 법화사’ 발표에서 “완도 법화사지는 12∼13세기가 전성기였고, 출토유물과 건물 조성 형태 등은 삼별초의 진도 거점이었던 용장성 궁궐지와 유사점이 많다”며 “삼별초와 관련한 완도의 운명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영준 제주대 교수(사학)도 “고려 시대 사찰이 관청기능, 요양소, 군대 주둔지 등 궁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봤을 때 법화사지는 진도에 주둔한 삼별초 군을 외곽에서 지원하는 진중사찰(陣中寺刹)로 볼 수 있다”고 윤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이번 행사는 완도군, ㈔장보고글로벌재단이 주최하고 장보고 해양경영사 연구회, 목포대학교 사학과·도서문화연구원이 주관했다. 강봉룡 장보고 해양경영사 연구회장은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완도군에 ‘고려 후기 대몽골 해양항쟁의 거점’이라는 새로운 해양사적 의미가 보태어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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